백옥연의 문향(文香), 가다가 멈추는 곳>-곡성 용산재, 덕양서원·장절공 신숭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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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옥연의 문향
백옥연의 문향(文香), 가다가 멈추는 곳>-곡성 용산재, 덕양서원·장절공 신숭겸
왕건의 옷을 입고 대신 죽어 고려를 건국한 공신||시대와 지역을 초월한 충절의 아이콘||예종, '도이장가'로 신숭겸 충절기려
  • 입력 : 2019. 04.25(목) 12:58
  • 편집에디터

0-0.용산재 가는길 압록역 앞 섬진강_백옥연

신숭겸을 찾아 가는 길. 덕양서원을 나와 용산재로 가고 있다. 덕양서원은 곡성군 오곡면에 있고, 용산재는 목사동면에 있다. 50리 남짓, 그리 멀지는 않은 길이다. 거기 가는 길이 셋 있다. 하나는 찻길이고, 하나는 기찻길이고, 또 하나는 물길(뱃길)이다. 셋은 나란히 흘러간다. 찻길은 구례 가는 국도 17호선이고, 기찻길은 익산에서 여수로 가는 전라선이다. 물길은 섬진강을 따라 남하하다가 압록에서 보성강으로 우회전하여 흐른다. 강이 흐르고 큰 버스들이 달리고, 기차가 터널을 빠져나올 때, 셋이 함께 갈 때가 아름답다. 봄이 깊어 백화난만하였던 길에, 동백, 산수유, 목련, 철쭉, 살구, 자두, 복사, 앵두, 헤아릴 것 없이 지천에 피었더니만, 차가 지나는 바람결에 아직 남은 벚꽃 잎들이 눈처럼 휘날리는 것은, 어느 상춘이 이만할까 싶다. 제일 빠른 것이 고속철의 기차다. '쉬익∼'하는 소리만 남기고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린다. 그 다음이 버스와 트럭이 다니는 포장도로이고, 그리고 강물인데, 기차는 미래로 가버리고, 강물은 과거로 흘러가고, 우리가 사는 현재의 속도는 어디쯤일까? 나는 신숭겸을 만나러 1000년의 세월을 거슬러 가야하니, 빠른 속도로는 오히려 그를 만날 수 없고, 저 강물의 속도로 느릿느릿 찾아갈 수밖에 없다.

님을 온전케 하온/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니/ 넋이 가셨으되/ 몸 세우고 하신 말씀

직분 맡으려 활 잡는 이/ 마음 새로워지기를/ 좋다 두 공신이여/ 오래 오래 곧은 자최는 나타내신져

도이장가悼二將歌(고려 예종 1120년)

때는 고려 예종 1120년 10월. 임금이 서경의 팔관회에 참관하여 잡희를 즐기는데 저쪽 뜰에 관복을 갖추어 입은 허수아비 둘이 말 위에 앉아 뜰을 뛰어다니고 있다. 어찌 허수아비가 뛰어다닌단 말인가. 임금이 따져 물으니, 그 둘은 신숭겸과 김락으로, 태조 왕건이 견훤과 싸우다가 궁지에 몰렸을 때 왕건을 대신해서 죽은 공신이라 한다. 그 공을 높이고자 태조 때부터 팔관회에서 추모하는 행사를 벌여왔다. 태조는 그 자리에 두 공신이 없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복식을 갖추고 자리에 앉게 하였다. 그랬더니 두 공신은 술을 받아 마시기도 하고 생시와 같이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는 것이다. 예종은 두 공신의 행적을 듣고 감격해서 그 후손을 불러 관직을 내린다. 더불어 시 한편과 고려가요를 지어 그 충절을 기렸으니, 그 노래가 '도이장가'다.

용산재는 목사동면 신숭겸로 226번지 구룡마을에 있는 그의 생가 터다. 거기에는 신숭겸의 탯자리인 용산단, 유허비각이 있고 그 담장 너머 신숭겸 장군 동상이 있다. 신숭겸(?~927)은 전라도 곡성 사람이다. 어려서 이름은 능산이고 본관은 평산, 시호는 장절공이다. 출신지·성분 등에 관련하여 여러 이설이 있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그의 출신지는 곡성, 본관지는 평산, 묘소 소재지는 춘천이라 한다. '여지도서'에는 곡성현 비래산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전라도 곡성은 출생·성장지로 용산재와 덕양서원·장군단이 있고, 대구 공산은 순절지로 포충재와 순절단의 신숭겸유적이 있고, 강원도 춘천에는 장지 묘소와 도포서원 터가 있다. 황해도 평산은 관향지로 태사사와 동양서원이 있다.

나말여초, 궁예의 태봉, 견훤의 후백제로 나뉜 혼란의 시기, 신숭겸은 춘천으로 터전을 옮겼고 901년 궁예가 철원에서 후고구려를 건국하자 왕건과 함께 그 휘화로 들어간다. 그러나 궁예의 폭정으로 배현경, 홍유, 복지겸 등과 함께 궁예를 폐위시키고 왕건을 옹립. 918년 고려를 건국하니 개국1등공신이 되었다. 하루는 신숭겸이 태조 왕건과 함께 황해도 평산 삼탄으로 사냥을 나갔다. 높은 하늘에 기러기가 세 마리 나는 것을 보고 태조가 "세 번째 기러기 왼쪽 날개를 맞혀보라." 하자 숭겸이 쏘아 명중하니 본관을 평산(平山)으로 사관射貫 하고 기러기가 날던 땅 300결을 하사하고 자손 대대로 조租를 받게 했으며 그 지역을 '궁위전'이라 불렀다.

927년, 후백제가 경주를 침략, 구원 출정한 왕건은 기병 5천명을 이끌고 대구 공산에서 견견훤과 싸워 형세가 심히 위급하게 되었다. 신숭겸은 왕과 옷을 바꾸어 입고 수레를 타고 김락과 함께 싸우다 전사하였다. 왕은 겨우 몸만 피하였다. 전투가 끝난 후 사람을 보내 목이 없는 숭겸의 시신을 수습, 도선국사가 왕건의 신후지지로 마련해 둔 강원도 춘천 방동에 장례하였다. 일설에는 황금으로 얼굴을 만들어 매장하였는데 도굴을 염려하여 봉분을 3개를 만들었다고 한다. 왕건은 신숭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장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신숭겸이 왕건을 구하기 위해 대신 전사한 대구 공산 전투 이야기는 신숭겸의 수많은 전설에서 백미에 속한다. 위급에 처한 주군을 위한 장렬한 전사는 비장을 넘어 숭고한 일이다. 이러한 까닭에 고려조는 물론 조선조를 통해 신승겸은 숭경의 대상이 되었다.

왕조시대에 군주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건 당연한 일로 치부되기 쉽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당시 급박한 상황 속에 실제 목숨을 내건 장군은 신숭겸과 김락 뿐이었다. 왕건을 살린 신숭겸의 행동은 한나라 고조가 하남성 팽성전투에서 항우의 군사에게 포위 되었을 때, 분장하여 고조의 수레를 타고 초나라 군사를 속여 죽음으로써 고조를 살린 기신(旗信)의 충절과 비견된다.

춘천의 목없는 무덤과 달리 곡성 태안사 뒷산에는 신숭겸의 목만 묻힌 무덤이 전한다. 신숭겸이 전사하던날, 그가 탄 용마가 숭겸의 머리를 물고 수백리를 달려 태안사 뒤쪽 기슭에 들었다. 그리고 삼일간 슬피 울어 스님들이 달려가서 장군의 머리를 석함에 넣어 묻어주었다. 지금까지 매년 3월16일 산신제와 함께 제사를 지내온다. 1934년 장군단 지하에서 석함이 발견되었는데 다시 묻고 장군단을 쌓고 입구에는 영적비를 세웠다. 후삼국기 전남일대는 구산선문 동리산파의 영향아래 있었고 동리산문의 본사가 바로 대안사였다. 호족과 불교 선종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발전을 하였다. 고려후기부터 조선후기까지 오랫동안 곡성지역의 토성은 평산 신씨였는데 이들이 나말여초 곡성을 대표하던 호족으로 추정된다. 신숭겸과 그의 가문과 태안사는 통일신라 후반부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태안사에서 천년이 넘도록 신숭겸 장군을 위하여 제를 지내지 않았을까.

신숭겸의 충절은 전국적·지역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출생지.성장지.순절지.묘지.서원.사우.영웅화.신격화 등 다양한 형태로 추숭되고 있다.

섬진강 따라 세 번이나 찾아 나선 문향, 덕양서원, 용산재, 태안사를 나오는 길 섬진강 변은 지금은 지고 없는 벚꽃이 꽃비가 되어 날리고 있었다.

〈백옥연 광주광산구 문화재활용팀장/광산구 역사문화전문위원〉

1.덕양서원 강당

2.덕양서원_서원기적비각

3.덕양서원 전사청(전사청은 제사 지낼 대 전사관이 집무하면서 제사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는 곳. 또한 제사 지낼 때 제수품 등을 준비하는 건물

[{IMG05}]

5.봄날, 덕양서원 강당 앞의 매화

6.덕양사 내삼문 으로 들여다 본 민들레

7.태안사 입구 영적비각_장군단 세운

8.영적비_태안사 입구 비각안에 소재. 장절공태사신선생영적비

10. 용산재 전경(강당 용산재, 동재 진덕재, 서재 모충재)

10-0.장절공 신숭경 동상

10-1. 용산단_좌-신숭경 장군의 태생지로 그의 태를 묻었다는 곳 우-고려태사장절공유허비

10-2.용산단과 고려태사장절신공유허비

10-3. 고려태사장절신공유허비

10-4. 용산재 영역

10-5.용산단 -신숭경장군 태생지로 그의 태를 묻었다는 곳

10-6.신숭경장군 동장

10-7.용산재 용산단. 유허비

4.덕양서원_덕양사 내_백옥연

태안사 일주문_백옥연

덕양서원 덕양사 내 배롱나무_백옥연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