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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선의 사진풍경 29>당신의 오늘은 어떠합니까?
또 새해가 시작되고 있네요. 그럼 우리도 모든 것에서 새롭게 시작해야겠지요. 그렇다고 우리가 다시 태어나게 된 것도 아닐테고 지난 시간을 지워버리는 것도 아니지만 새로 시작해 볼 수 있다는 것에서 그 의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요즘은 계절이 하 수상해서 눈내리는 정취도 만끽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함박눈이 내리는 도심을 걸어보고도 싶고, 드넓은 들판에 휘날리는 눈 속으로 내달려보고도 싶고, 토굴의 창가에서 따스하고 향기로운 차를 마셔가며 소복소복 쌓여가는 새하얀 눈들을 보며 멍때리는 것도 좋지않을까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다고 합니다. 당시의 오늘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별은 오늘도 외롭게 떠돌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박하선의 사진풍경 28>吉林省 유하현 태평천향 集安屯 고인돌
간밤에 눈이 내렸다. 확실한 방향도 모른 채 비탈길을 힘들게 올랐다. 칼바람이 드세 지는가 싶던 그때였다. 잡목 사이로 찾고 있던 고인돌이 눈에 띄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마주한 그 고인돌은 만주 일원에 흩어져 있는 다른 고인돌에 비해 그 규모는 작았지만 아담한 돌집을 연상케 했다. 주인이 떠나버린 지 오래인 듯한 돌집 형태의 고인돌. 외로움에 지친 모습이라고나 할까. 2천년, 3천년, 아니 그 이상의 세월을 삭히면서 내가 오기를 그렇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촬영 장비를 내려놓고 숙연한 마음으로 고인돌의 덮개석을 어루만지면서 나는 느낄 수가 있었다. 왜 이리 늦었냐고 하면서 고인돌이 흐느끼고 있다는 것을... 나도 눈물이 났다. 그냥 눈물이 난 것이다. 그래, 너무 늦게 찾아온 것을 사죄하는 것으로 눈물이라도 흘려야 했는지도 모른다. 이곳이 정녕 전생의 내 무덤자리라도 되는 걸까. 아니면 아주 먼 옛날의 내 사랑하던 사람들의.... 그래서 이토록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나를 불러들였던 것인가. 지치고 지친 몸이건만 순간 모든 피곤함을 잊게 하면서 이 고인돌과 나, 둘만의 조우에 칼바람조차도 순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박하선의 사진풍경 27>백제의 미소
바람 따라 백제의 흔적들을 찾아다니면서 충청남도 서산에 있는 마애여래삼존상 앞에 서게 되었다. 용현리 산기슭의 바위에 새겨진 이 삼존상은 섬세하기도 하지만 조각상의 미소가 일품이어서 '백제의 미소'를 대표하는 국보로 지정된 문화유산이다. 이곳은 중국의 불교문화가 태안반도를 거쳐 부여로 가던 행로상에 있으며, 600년경 이름 모를 석공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삼존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일화가 재미난다. 1959년 부여 문화재 관계자가 근처의 보원사지의 답사를 마치고 이 근방을 지나다가 나뭇꾼 한 분을 만났다. "혹 이 근방에 부처나 사람 모양을 바위에 새겨놓은 곳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부처는 모르겠고 산신령이 큰 마누라, 작은 마누라 거느리며 웃고 있는 것은 있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비바람에 의한 훼손을 막아야 한다고 호들갑을 떨면서 누각을 세워 안에 가두어 놓았었다. 하지만 보는 이들을 답답하게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훼손 정도가 더 심화되어 간다고 알려져 원 상태로 돌려 놓아 제 모습을 보게 되었다. 왕국은 사라지고 없지만, 오늘도 백제 미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천년의 미소가 반갑게 맞이하며 지난 날을 그립게 한다.
박하선의 사진풍경 26> 두만강변의 서정
세상의 온갖 것들이 야단법석을 떨면서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시간은 끊임없이 흐르고 계절은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다. 가을인가 싶더니 어느 새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는 것인가. 여행도 마음대로 떠나지 못하는 이 답답한 시절이지만 이 또한 흐르는 시간 속에 묻혀서 지나 갈 것이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는다. 이맘 때 쯤에 두만강변을 떠돌던 생각이 났다. 강이라기 보다는 동네의 개천이라고 해야 할 정도지만 우리 민족의 눈물을 모아 흐르는 한(恨) 많은 강이지 않던가. 힘들게 살아간다는 북한 동포들의 삶도 지척에 보이는 중국 쪽 '숭선'의 조선족 마을에서 민박을 하면서 맞이한 아침이다. 우리가 잃어버렸거나 아니면 무심히 떠나보낸 시간들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박하선의 사진풍경 25>발해의 흔적을 찾아서
연해주 크라스키노의 벌판이다. 온 사방으로 드넓게 널려있는 갈대숲을 헤집고 다녔다. 이 근처 어딘가에 성터의 흔적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서. 하지만 잃어버린 천 년의 세월은 천명(天命)을 받든 이 몸에게도 감당키가 만만치 않았다. 두만강 하류의 북한과의 국경이 지척인 곳이다. 배낭을 메고 카메라 삼각대를 총처럼 들고 다니는 것이 오해 받기 쉽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을 때 일은 이미 터졌다. 러시아 국경수비대의 포위망이 좁혀 온 것이다. 위기에 처한 황제의 밀명을 받들고 적진으로 뛰어든 것도 아니면서 꼴사납게 되었지 뭔가. 그들은 막무가내고 나는 답답하지만 어쩌겠는가. 결국은 호의를 배풀어 추방령이다. 망국의 한(恨)은 지금도 뱃길로 일본을 오가던 그 자리에서 황제의 조서를 받들고 있을 것이다.
박하선의 사진풍경 24>발해(渤海)의 땅
고구려 유민들이 망국의 한(恨)을 딛고 다시 세운 나라가 발해(渤海)다. 하지만, 그 또한 대가 끊긴 폐허 위로 천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남아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 남아 있기를 기대하는 그 자체가 모순일 것이다. 지금은 남의 땅이 되어버린 그곳에서 잡초속의 토성(土城)들의 흔적과 주춧돌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무엇을 보여주자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느낌을 전달하는 것에 무게가 있기에 허허로운 벌판에 서서 들풀에게, 나무에게, 그리고 지나가는 바람에게 말을 건다. 연해주 우수리스크 지역의 발해성터에서 솔빈강이 내려다 보이는 풍경이다. 찾아가는 여정만으로도 즐겁고, 황량한 벌판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 언저리에 울림이 남는다. 하지만, 그 흔적 앞에서 지난날을 그리워하며 감상에 젖어 보는 것으로 끝내자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빼앗긴 들녘이나 잃어버린 왕국을 찾아 나서자는 것 또한 더더욱 아니다. 잃어버렸거나 잊혀져가는 것들에 대한 그 못 다한 사연과 감추어진 진실이 있다면 귀를 기울여서 과거를 통해 미래의 꿈을 키워 나가자는데 있다.
박하선의 사진풍경 23>여행의 기억
요즘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곤욕을 치루고 있다. 이 난리가 앞으로도 얼마동안 이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이 기회에 우리 인간들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세계의 꼼꼼한 곳들을 찾아다니면서 작업을 하며 즐거움을 찾던 일도 벌써 옛 일이 되어가는 듯 해 아쉬움이 많다. 몇 해 전에 다녀 온 트레킹으로 유명한 북인도의 잔스카르의 여행을 떠올려 본다. 아직도 문명의 손길이 크게 미치지 못한 오지에서의 순수한 삶들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게 했던 기억들이 새롭다. '빠둠' 인근의 '카르차' 사원의 원경이다. 이런 곳이라면 지금 유행하고 있는 코로나 질병도 비켜 갈 것 같지 않는가. 오늘도 그곳에 부는 바람을 맞이하고 싶다.
박하선의 사진풍경 22>백두산 천지에서 맞이한 한가위
최근 일는 아니지만 백두산 나들이를 나섰을 때의 기억이다. 가을색 짙어가는 시기였고, 천지에 올랐던 그 날이 또 추석날이었다. 그래서 인지 한복을 차려입은 조선족 동포들이 여럿 눈에 띄였다. 기상이 변화무쌍하기로 유명한 곳이지만 천지신의 기분이 좋았던지 그날 따라 화창하고 바람 또한 비단결 같았다. 비록 새련된 모습은 아니지만 민족의 영산으로 소풍나온 그들과 함께 함이 가슴 뜨겁게 하고 우리에게서 흘러가버린 세월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어 더 없이 좋은 날이었다.
박하선의 사진풍경 21>동해의 외로운 섬 - 독도
검푸른 바다색에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동해 바다. 그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 서면 몰아치는 찬바람에 옷깃을 여미면서도 우리는 낭만을 얘기하곤 한다. 하지만 바라만 보는 것을 너머 그 바다 속으로 뛰어 들고, 파도를 타고 수평선을 넘다보면 어느 틈에 낭만은 뒷전으로 밀리고 배 멀미의 울렁거림과 함께 가슴 깊이 밀려드는 고독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동해의 그 깊은 바다에 외롭게 떠있는 섬들은 유난히도 외로워 보이는 것일까. 울릉도와 그 부속 섬들이 그렇고,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독도가 더욱 그렇다. 또 아침 햇살을 제일 먼저 받는 우리의 영토가 독도라고 말한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곳에 우리 마음대로 발을 내려놓지 못하게 되고 있다. 몇 가지의 구실이 있다지만, 인간 세상에서 빚어지곤 하는 안타까운 현실 중의 하나다. 이렇다보니 독도는 더 외롭고 서럽다. 그래서 이름도 독도이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도를 비롯한 동해의 외로운 섬들은 말한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소유, 또는 개발 같은 인간 세상의 헤게모니가 아니라 그들의 해묵은 고독에서 묻어나오는 고고함을 알아 줄 수 있는 친구들이 필요할 뿐이라고… 오늘도 그 섬들에는 부서지는 파도소리, 괭이갈매기들의 날개 짓과 울음소리가 넘쳐나고 있을 것이다.
박하선의 사진풍경 19>태항산의 독립군들
중국 화북성의 서남쪽에 태항산이 있다. 이 산은 험난하고 깊은 오지여서 예로부터 이곳을 기준으로 동쪽을 '산동(山東)'이라 불렀고, 서쪽을 '산시(山西)'라 불러오면서 역사 속에 자주 등장하는 유서 깊은 명산이다. 이곳의 자연이 비경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홀리기 보다는 우리는 또 다른 이유로 이 산을 찾을 필요가 있다. 일제하의 암울한 시절에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청춘을 바쳐 싸워 나간 우리 독립군들의 눈물이 베이고 그 흔적이 곳곳에 산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의용군'이 바로 그들이다. '호가장 전투', '십자령 전투'가 대표적이지만 최초의 주둔지이자 무명열사의 무덤이 남아있는 '상무촌', 아직도 한글의 흔적이 또렷한 '운두저촌', 윤세주와 진광화의 무덤이 있는'석문촌', 천재 음악가 정율성 기념관이 들어서 있는 '태항오지산' .... 총알이 빗발치는 사선에서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몸부림치게 만들었고,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박하선의 사진풍경 18>고려인 할머니
중앙아시아에는 스탈린 시절에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해간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일명 '고려인'이라 부른다. 이주 초창기에 있었던 그들의 한(恨)맺힌 삶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서 어느 정도 알고 있고, 이제 꽤 많은 세월이 흘러서 그들도 현지 생활에 적응하면서 기반을 다져오고 있는 게 현실이다. 사막과 초원, 그리고 만년설을 이고 있는 산맥이 어우러져 있는 키르기즈스탄에도 고려인들이 몇 군데 흩어져 살고 있다. 그 중에 '까라발타'의 변두리에 있는 한 고려인 집에 들렸다. 할머니와 아들, 손녀가 반갑게 맞이해 준 이 집은 텃밭이 있는 우리 시골집 형태와 흡사했지만, 내부에서는 카펫트를 비롯한 집안 가구들과 구조가 우리와는 많이 달랐다. 조금씩은 알아듣기는 해도 할머니 외에는 한국말도 잘 통하지 않아서인지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환경에서 자란 손녀의 모습에서 우리민족의 채취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많은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대할 수 있는 모습에 동질의 유전자를 지녔을 그 할머니는 분명 우리 이웃집 어딘가에 살고 있어야 할 분인데, 이국 멀리 너무도 많이 다른 환경 속에 고향의 뿌리를 내리고 태연스럽게 생활해 오고 있다는 것에서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박하선의 사진풍경 17>둥지로 돌아가지 못한 왜가리
영산강을 따라 산책을 하고 있었다. 갖가지의 초목들 사이에서 들꽃들이 난무하다. 잘 가꾸어진 정원이 부럽지 않는 풍경이다. 무엇을 찾아가는 것도 아니고 누구를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닌 지금 이 발길이기에 좋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언제부턴가 이런 들녘에서 일하는 사람들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게 변하기 마련이라고 하면 그만이지만 그래도 일하는 사람이 들어있는 풍경이 그립다. 양어장이 있었다. 물고기가 들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왜가리 한 마리가 설치해 놓은 실 덫에 걸려 죽어 있었다. 인간의 먹이를 탐낸 댓가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애잔하다. 그 왜가리는 살기 위해서 몰고기를 잡아 먹어야만 했고, 양어장 주인 또한 살기 위해서 그 물고기들을 지켜야만 했을 것이다. 생존의 경쟁이 치열한 세상이지만 우리 인간도 살고 다른 생명체도 함께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은 어디에셔 찾을 수 있을까. 둥지로 돌아가지 못한 왜가리 한 마리를 남겨두고 떠나는 발길에 한 줄기 바람만이 무심할 뿐이다.
박하선의 사진풍경 16>외로운 섬 가거도(可居島)
바람을 따라서 원추리, 엉겅퀴 피어있는 풀밭사이를 걷다가 산딸기 따먹고, 벼랑 끝의 바위 위에 걸터앉아서 꽃나비와 친구하며 망망한 바다와 저 아래 암벽에 부서지는 백파를 바라본다. 혼탁한 속세에서 벗어나 먼 곳에 와 있음을 실감케 함은 물론이요, 세상에 지친 영혼을 잠시나마 쉬게끔 하는데 제격이다. 만일 이런 곳에 귀양살이 왔다면 그건 호사스러운 것이다. 한국 영토의 최서남단인 가거도. 상하이에서 닭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곳이다. 일제시대 때 '소흑산도'라 명명되어 불려오기도 했지만 원래의 이름은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의 가가도(嘉佳島)였고, 지금은 '가히 살만한 섬'이라는 뜻의 가거도(可居島)라 불린다. 지금은 쾌속선이 운행되고 있어 육지와의 연결이 빨라지기는 했지만 망망대해를 건너야 하기 때문에 풍랑이 조금만 일어도 결항이 되곤 해 찾기가 쉽지 않는 멀고도 먼 외로운 섬이다. 절경을 이루고 있는 섬등곶 주변의 항리마을. 옹색한 모습으로 들어서 있는 집들이 손짓한다.
박하선의 사진풍경 15>산천군 외공리 양민 학살 터에서
6.25 직후 빨치산 토벌작전이 한창일 무렵, 가족 관계이거나 또는 부득이하게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밖에 없었던 민초들이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냉혹해서 정치나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 자식들에게 까지 화를 미쳤다. 빨치산에 당한 앙갚음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토벌군에 의해 마을 양민들이 집단으로 학살된 비극이 있었다. 그 중의 하나인 산청군 사천면 외공리 암매장터의 십여 년 전 발굴 현장이다. 유해의 대부분은 어린이들이었다.
박하선의 사진풍경 14>기억 속으로
여기 저기 빈집들이 보인다. 아니 버려진 집들이다. 누군가의 시간이 녹아 역사를 이루었을 그곳이지만 이제 아무도 찾는 이들이 없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그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한다. 모두들 어디론가 떠나기에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했다. 특히 농어촌의 공동화 현상이 심각하다. 늙은 부모가 떠나고 나면 그 자리를 자식들이 이어받아 오다가 언제부터인가는 떠난 자식은 돌아오지 않는다. 단지 기억 속에 묻어둘 뿐이다. 누군가 떠난 빈자리 버려진 집들이 오늘도 눈물짓는다.
박하선의 사진풍경 13>백암산성에서
만주 지역인 랴오닝성 랴오양과 등타시 사이에 있는 백암산성은 현지에서는 '엔쪼우성'이라 부르는 고구려 산성이다. 태자하가 흐르는 것을 굽어보고 있는 산정에서 1500년의 세월을 견디어 오면서도 비교적 다른 성에 비해 남아있는 성벽의 상태가 양호한 곳이다. 또한 기단 부분을 보면 전형적인 고구려식 들여쌓기 형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549년에 돌궐의 1만 군대의 집중 공격에도 함락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규모는 크지 않지만 이 성벽의 견고함을 짐작케 한다. 일부 무너져 내린 성벽의 틈바구니로 나가 잡목과 가시덤불 사이를 헤집고 다녀 본다. 성벽의 위용이 한층 드높아 보이고 그 성벽에서 떨어져 나온 돌덩이들의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그뿐이겠는가. 칼바람의 안내를 받아 장대에 올라서면 살을 에는 듯한 추위를 느끼기 보다는 잃어버린 역사와 빼앗긴 산하에 대한 서러움에 가슴이 미어지게 된다.
박하선의 사진풍경 12>오래된 침묵에 스며들다
여기 저기서 거대한 돌덩이들이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그것도 놀랄 만큼의 아주 오랜 세월을 말이다. 당연 돌덩이들이야 억겹의 시간을 응축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냥 돌덩이들이 아니고 인간의 입김을 쐬고 손길이 미친 것들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고인돌'이라 부른다. 세계 도처에 거석문화의 하나로 이 고인돌들이 산재하고는 있지만 우리 한반도에 제일 많고, 특히 남도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보니 과히 고인돌 왕국이라는 말도 서슴치 않는다. 청동기 시대의 산물이라고 말하지만 그 시간 또한 얼마나 거슬러 올라가야 될지 아직도 수수께끼에 싸여있는 부문이 있기에 세계 최고의 건축물이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거의가 고대인들의 무덤이나 제단이라 알려져 있고, 세계문화유산으로 까지 등재되어 있지만 우리는 주변에서 흔하게 접해 오다보니 그 가치와 중요성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듯 싶다. 오늘도 산기슭이나 들녘에서 오랜 침묵으로 자리를 지켜오고 있는 고인돌들을 만난다. 담양의 궁산리 논 가운데에 있는 이 고인돌도 그 중의 하나다. 봄기운을 받으며 그 오래된 침묵 속으로 스며들고 싶다.
박하선의 사진풍경 11>골목에서 만난 세상 이야기
광주시의 달동네 '발산부락'의 골목길을 기웃거리면서 조만간 사라져 갈 것들을 기록해 두고 싶었다. 이런 것들은 좋으나 궂으나 한 시대의 풍경이 되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빈집들이 많지만 아직도 자리를 지키며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그 골목의 적은 온기나마 유지해 가고 있다. 어느 남루한 담벼락에 시선이 멈추게 되었다.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노동자들의 입김이 거세질 때의 세상 이야기가 화석처럼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내용은 물론 지금도 진행형이지만 왠지 씁스름한 웃음이 일었다. 기록해 두겠다고 이리저리 두리번 거리고 있을 때 한 사내가 그 담장 안에서 수상하다는 듯 쳐다보기에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빛이 바뀌고 나면 또 다른 느낌이 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골목 산책 마지막 시간에 다시 그곳에 들렸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꽤 많은 시간 뭇 사람들의 별 관심 없이도 그 자리를 지켜왔던 것이 갑자기 오기스러운 그 누군가에 의해 말끔히 씻어지고 말았지 뭔가.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순간 참으로 허탈하고 허망하기 까지 했다. 그래서 삼라만상은 모두 허상이라 했던가.
박하선의 사진풍경 10>제주 4.3 사건의 섯알오름 양민 학살터
민족의 비극을 보여준 또 하나의 잊여서는 안될 사건이 제주 4.3 이다. 공교롭게도 오늘이 바로 그날을 되새기는 날이다. 코로나 질병으로 지금 온 세계가 난리통이라지만 그날의 아픔을 잊고 넘어가서는 안된다. 이념의 갈등을 구실삼아 군경토벌대에 의하여 대략 3만명 이상이 학살된 제주 4.3사건이 진정국면에 접어들 무렵,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치안국의 불법적 '예비검속' 광풍에 무고한 제주 양민들이 경찰에 의해 학살되어 산야에 암매장 되거나 깊은 바다에 수장되었다. 그 중의 하나인 이곳 '섯알오름'은 일제 때 최대 탄약고였고 미군에 의해 폭파되면서 그 충격으로 커다란 웅덩이가 생겨난 곳이다. 252명이 근처의 '알뜨르' 비행장과 이곳에서 총살되어 암매장 된 후 7년 동안 출입금지 구역으로 묶여 있다가 유족들의 끈질긴 탄원 끝에 유해들을 수습하여 근처에 안장하고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池)'라는 비를 세웠다. (각기 조상이 다른 132명이 죽어 뼈가 엉퀴어 하나가 되다.) 많은 시간이 흘러가버린 어느 4월에도 그 슬픔을 잊지 말자는 듯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박하선의 사진풍경 9>'슬픈 섬-사할린', 그 곳에 우리 동포들의 눈물이 고여 있다.
일제하에서 해방된지 75년이 되어가지만 아직도 그 기쁨과 의미를 모르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 동포들이 있다. 그들이 바로 일제 식민지 시대 '유배의 섬'이라 불렀던 '사할린'에 강제 징용 또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건너가 살게 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언제부턴가 고향 방문의 길이 열리게 되었고, 일부는 '고향마을'이라는 보금자리에 이주해 살게 끔 되었다. 하지만 또 다른 이산가족의 아픔을 염려해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생의 종착역을 눈앞에 두고 안타까워 하시는 분들이 소수 남아있다. 그중의 하나인 '최남출' 할머니의 얼마 전 모습이다. 어쩜 이 분도 지금쯤은 돌아가셨을지도 모른다. 이제 사할린 동포들은 배고픔이나 강제노역에 시달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직껏 해방의 기쁨을 모르고 살고 있다는 이 할머니의 하소연이 지금도 귓전을 맴돌고 있다. "이제 가야겠다. 몸도 아프고 하니 따뜻한 한국에 가서 살아야겠다!" 나라 잃은 국민으로 지옥 같은 노역에 시달리며 눈물 젖은 주먹밥 조차 배불리 먹지 못했던 그들. 가해자인 일본에게 책임을 묻는 것 외에 늦게나마 동포들의 애달픔을 달래 줄 또 다른 방법은 없는지 우리 모두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