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필 광주교육연구소 이사 |
음반을 쭉 들어보면 뚜렷하게 감지되는 두 그룹의 차이가 있다. 가사를 전달하는 양상이 다르다. 젊은 가수들은 꼭꼭 씹어 집착하듯 가사를 소화한다. 반면에 중견 가수들은 자신의 소리가 더 중요하고 가사에 덜 집착한다. 한영애와 최정훈이 부른 <사랑을 사랑하게 될때까지>에서 차이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한영애의 매력이 잘 도드라지는 녹음이지만 이 버전에서 가사는 잘 전달되지 않는다. 반면에 최정훈은 이렇게까지 해야하나 할 정도로 가사를 정확하고 꼼꼼하게 전달하려 애쓴다.
이런 양상은 비단 한 곡에서 끝나지 않는다. 작사가인 조동희가 직접 부른 <거울 속의 사람>에서도 동일하게 관찰된다. 조동희가 부른 버전에서는 잘 전달되지 않았던 가사의 의미가 너드커넥션의 서영주가 부른 버전에서는 오롯이 잘 드러난다. 예술이 한 사회를 증후적으로 보여준다는 가정 아래 이 프로젝트 안에서 감지되는 차이를 확장하면 젊은 세대는 기성 세대에 비해 말에 더 집착한다 볼 수 있다. 이것은 썩 전복적인 발견이다. 그 동안 젊은 세대가 문해력이 떨어지고, 난독증이 심하다는 이야기를 도처에서 들어왔기 때문이다.
말을 축약, 분절시키고, 외계어를 사용하고, 이모티콘을 난발하는 새로운 세대는 말을 오염시키고 있다 공격하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투트랙 프로젝트를 통해 발견한 젊은 가수들의 ‘가사집착’이 자못 전복적으로 느꼈던 것은 새로운 매체에 익숙한 세대를 향한 공격들을 내심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을 청소년 시기부터 혹은 태어났을 때부터 사용한 세대는 스마트폰으로 접한 영상과 이미지 때문에 기존 매체인 문자나 말의 사용에 더 무디고 무능력 하다고 막연하게 말하고 재단해 왔다.
하지만 새로운 미디어는 과거의 미디어를 포괄한다. 스마트폰은 문자와 음성이 포괄한다. 그렇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문해력에 스마트폰이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재단하는 것은 오류이다. 오히려 문해력의 양상이 바뀌고 있다고 혹은 문해력의 구성요소가 확장되고 있다고 진단하는 것이 옳다. 다만 이 변동 속에서 누군가는 불편함을 느낀다. 소통이 단절된다고 느낄 수 있다. 모두 모여서 대화하고 있는데, 한 명이 스마트폰을 꺼내서 유심히 들여다 본다면 그런 문화에 익숙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불편함이 곧 문제는 아니다.
모여 앉아 이야기하는 문화에 익숙한 세상에서 누군가 혼자 책을 읽으러 들어간다면 어색했겠지만, 이미 읽는 개인이 대중화된 세상에서는 읽는 것이 장려된다. 지금은 미디어가 급변하는 세상이라서 아직 혼동 속에 있다. 하지만 헷갈린다고 어떤 것을 부정적으로 쉽게 낙인찍을 수는 없다. 배움이 필요한 대상은 젊은 사람들만이 아니다. 전적으로 낯선 것 속에서 긍정성을 찾아내는 것이 배움이라면, 이제 젊은 세대의 변화를 감지하고 불평을 줄이는 것이 기성세대에게 요구되는 배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