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서대문형무소에서 울려퍼진 민중의 노래와 반백 년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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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서대문형무소에서 울려퍼진 민중의 노래와 반백 년의 여정
403, <소리 내력>의 내력
  • 입력 : 2024. 07.11(목) 18:13
임진택 창작판소리 오적, 소리내력 리플렛표지, 1993
임진택 창작판소리 윤상원 팜플렛
20180222-윤상원가 리플렛 앞면
때는 1974년 7월 13일, 서대문형무소 747호 감방 앞이었다. 때마침 긴급조치 4호에 의거, 구형을 받고 우르르 몰려가던 일군의 사람들이 있었다. 조작된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의 주역들이었다. 한목! 한목! 그들이 감방 안쪽에 대고 임진택을 불렀다. 당시부터 김지하를 두목이라 부르고, 임진택을 한목이라 불렀다. 거 누구요 누구? 까치발을 딛고 밖을 내다보던 한목에게 무리들이 껄껄거리며 대답했다. 나 김지하! 나 유인태! 한목이 다시 물었다. 구형은 어찌 되었소? 무리들이 함께 답하였다. 사형이다 사형! 껄껄껄! 사형을 선고받은 직후 이들이 내보인 풍경이다. 비극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고 조선왕조실록의 한 장면을 보는 듯도 하다. 이들이 터뜨린 웃음의 비밀, 아니 비극적 미학의 아우라라고나 할까. 그 정체가 7월 13일 저녁 감방 안에서 펼쳐졌다. 임진택의 이른바 창작판소리 <소리 내력>이 강창 되었기 때문이다. 임진택이 아직 판소리를 배우기 전이었기에, 지금의 판소리라고는 하기 어려운, 음영하는 서사민요 정도의 맥락이었다고 추정된다. 아니면 강창(講唱)의 번역 뜻이기도 한 발라드풍의 음영 형식, 아니면 ‘냅다 내지르기 방식’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나는 다만, 그 이름이야 뭐라고 하든 그 중심에는 담시(譚詩)가 있었음을 주목하고 있다. 서사시 곧 이야기를 노래로 불렀다는 점, 나아가 이 노래 양식인 강창(講唱)이 그 중심에 있다.



<소리 내력> 강창(講唱)사건, 소리꾼 임진택과 윤상원



이렇게 시작된 <소리 내력>이란 노래는 이른바 운동권 중심으로 서서히 퍼져나가, 마치 안개처럼 사람들의 심중에 스며들게 된다. 임진택 외에 <소리 내력>을 잘 불렀던 이가 광주민중항쟁의 아이콘이랄 수 있는 윤상원이다. 1979년 12월 31일 5·18 당시 도청 사수대였던 윤상원이 광주에서 임진택의 <소리 내력>을 강창한 일화가 있다. 광주의 민주 운동권이 총집결한 송년 행사에 초청받아 간 자리였다. 임진택이 그러했던 것처럼, 윤상원 또한 판소리를 전혀 배운 적이 없이 단지 임진택의 <소리 내력> 녹음본을 듣고 흉내 낸 것이었다. 노래를 지은 본인보다 테이프로 듣고 배운 윤상원이 소리를 더 잘하더라고 했다. 낭송 수준에서 약간 발전된 강창 형식이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아무래도 소리깨나 하던 남도의 DNA를 가지고 있었을 윤상원이나 그 그룹에게 강창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1980년 3월 15일, 광주지역 문화운동이 출범한 ‘극단 광대’ 창립행사 ‘돼지풀이 마당굿’ 공연장에서 임진택은 윤상원과 또 한 번의 운명적 만남을 가진다. 그로부터 두 달 후 전남도청을 마지막까지 사수하다 사살된 윤상원은 5.18 수괴로 몰려 투옥된 김상윤의 청바지를 입고 처참하게 짓이겨진 채 삶을 마감했다. 아마도 마지막 어느 순간에 당신이 즐겨 부르던 <소리 내력> 한 구절을 읊조렸을지도 모른다. 김지하가 창안한 ‘안도’라는 캐릭터와 판소리 형식이라는 노래하기 방식이 이들에게 끼쳤을 영향, 작창자 임진택보다 더 잘 부른다고 했을 정도로 강창했던 내력을 생각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지난 칼럼 145회(2019. 5. 16)에서 소개했던 소회의 일부를 여기 다시 옮겨둔다. “살고 죽는 일에 대해 초연해질 수밖에 없음을. 소수의 인원으로 전남도청을 사수하다 계엄군의 총탄에 스러져갈 때 윤상원은 무엇을 상상했을까? 빗발치는 총알들 사이 도청 유리창 밖 하늘은 누구를 떠올리게 하였을까? 5.18의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은 1981년 윤상원과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 열린다. 주지하듯이 황석영이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을 차용하여 글을 짓고 김종률이 곡을 붙여 추모곡을 만든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탄생한 내력이다. 하지만 이 노래는 추모에 그치지 않았다. 영혼결혼식 이후 구전으로 복사본으로 빠르게 회자 되더니 이내 5.18 광주민주화항쟁을 상징하는 노래로 자리 잡게 된다. 노래가 부활하고 윤상원이 부활하고 박기순이 노래를 통해 부활했던 것이다. 아니 임진택의 소리처럼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민중들 사이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그러했듯이 판소리 메니아 층에서는 <소리 내력>이 또한 그러했다. 5.18항쟁이 발발하기 전에 이미 투옥된 김상윤이나 전국화되어 있던 민족문화운동 그룹에게 <소리 내력>이 끼친 영향은 생각보다 컸다고 나는 보고 있다. 이 소리의 내력이 김지하의 문학에서 임진택의 창작판소리로 다시 윤상원과 또 다른 윤상원들의 민주화운동과 실천으로 확장된 내력이야말로 한국 판소리사에서 크게 주목해야 할 맥락이라고 나는 보고 있다. 임진택의 <소리 내력>이 수많은 행사에 초청되고 사람들에게 환호받았던 것은 그들 스스로 화자 ‘안도란 놈’에게 자신들을 투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컨텍스트 속에서 임진택은 이른바 판소리 광대의 길, 나아가 명창의 길을 걷게 된다. <소리 내력> 강창 사건은(사건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1970년 월간지 ��사상계��에 <오적>이 실리면서 김지하가 구속되고 이어 ��사상계��가 폐지되는 과정을 겪으며 유신정권과 맞섰던 시대의 흐름 속에서 조망될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이야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고안되었던 판소리의 역사뿐 아니라 연희사, 나아가 우리 역사의 또 다른 내력 속에서 평가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임진택의 일종의 알아차림 같은 것이 그윽하게 스며들어 있다. 그 하나는 판소리를 비롯한 우리의 소리 내력에 대한 알아차림이고 또 다른 하나는 김지하의 유훈 같은 부탁에서 비롯된 소명의식이다. 두목 김지하가 당시 사형을 선고받고 한목 임진택에게 각별하게 부탁한 말이 “나는 이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수밖에 없으니 네가 문화 운동을 해달라”였기 때문이다. 김지하의 예지로 쓰인 담시 <소리 내력>의 명실상부한 역사적 내력이 횡으로 종으로 그 영역을 확장하며 오늘날 민족의 노래인 판소리로 재구성된 것은 판소리사의 거울 같은 사건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노래로 이야기하기 방식의 사회적 위상과 실천이라는 점에서도 더욱 주목한다.



남도인문학팁

임진택의 <소리 내력> 반백 년, 판소리의 소리 내력 반 천년

임진택의 판소리는 1974년 7월 13일 김지하의 담시 <소리내력>을 강창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긴급조치 4호 민청학련 사건으로 이철 등 7명이 사형선고 받은 후, 서대문구치소의 오락시간을 통해서였다. 광주민중항쟁의 아이콘이었던 윤상원도 이 노래를 즐겨 불렀고 아마도 도청에서의 마지막 날 이 노래를 읊조렸을지 모른다. 시대를 비판하고 사회적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노래하기 방식 즉 노래로 말하기 방식을 거슬러 오르면 조선 세조 10년(1464) 12월 나례(儺禮) 때에 축역우인(逐疫優人)이 잡희(雜戲)로서 스스로 문답하여 탐관오리의 일들을 거리낌 없이 연출했던 광대소학지희의 기록에 가 닿는다. 그로부터 반 천년, <소리 내력>으로부터 반백 년, 임진택은 우리 민족과 민중의 눈물과 웃음, 좌절과 환희의 역사를 오롯이 직조하여 창작판소리 열두 바탕을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야기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고안되었던 판소리의 역사뿐 아니라 연희사, 나아가 우리 역사의 또 다른 내력임이 분명하다. 한국 판소리사 반 천년을 고스란히 축소해놓은 듯한, 그래서 마치 한국 판소리의 거울과도 같은 임진택의 창작판소리 50년을 기념하는 학술대회가 경이롭게도 서대문형무소에서 강창했던 바로 그날인 7월 13일 판소리학회 주관으로 노무현시민센터에서 열린다. 나는 기조 발제를 통해 ‘임진택의 <소리 내력> 반백 년 판소리의 소리 내력 반 천년’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네 소리의 역사를 증언한다. 우리 소리를 사랑하는 분들의 관심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