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모내기 풍경 속 백로와 왜가리, 질퍽한 흙 밟고 모 심는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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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 모내기 풍경 속 백로와 왜가리, 질퍽한 흙 밟고 모 심는 경험
401. 무안 학마을 모내기
모내기 체험을 한 고사리손 아이들이 장차 자라,
흙과 물과 햇빛과 논의 생태를 알아차리고,
백로, 왜가리 가득한 이 아름다운 땅에서
기운 생동하게 살아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 입력 : 2024. 06.27(목) 15:22
유치원생들이 무안군 학마을에서 모내기 체험을 하고 있다.
2024년 무안상동들노래 학마을 모내기 풍경 1.
2024년 무안상동들노래 학마을 모내기 풍경 2.
수천 마리가 넘어 보이는 백로와 왜가리 떼들이 새하얗게 내려앉은 들녘으로 신명 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일하면서 부르는 노랫소리다. “에~라~먼~들/ 잘도 무네 잘도 무네/ 에~라~먼~들/ 우리네 농군들 다 잘 무네/ 에~라~먼~들~” 지난 주초 무안군 무안읍 용월리 상동마을 모내기 풍경이다. 바로 옆이 천연기념물 211호로 지정된 백로·왜가리 번식지이니 일부러 그려놓은 한 폭의 그림 같다고나 할까(지금은 국가유산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본래 남성 중심의 일꾼들이 모내기를 하는 곳이라 장중한 선율이 울려 퍼질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여성의 메김소리가 들려오고 고사리손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먼저 들려온다. 들노래 보유자 고윤석 옹이 몇 달 전 작고하시는 바람에 수석 이수생인 서민경 씨가 메김소리를 맡아 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올해는 무안군 관내 세 군데 유치원에서 모내기 체험을 왔다. 20여 학부모들과 합하니 100여 명을 훌쩍 넘는 숫자다. 각 유치원에서 아이들 키 높이에 맞춰 깃발을 만들고 머리띠를 두르는 등 정성을 들였다. 무논으로 들어가 보는 게 처음일 아이들에게 논바닥의 질퍽거림과 볏모를 심는 손가락의 감촉들이 어떠했을까? 물과 흙이 만나고 어린 모가 땅에 심어지는 과정이 이 아이들에게 어떤 경험으로 다가왔을까? 아니 무엇보다 산등성이에 하얗게 내려앉은 백로와 왜가리들을 배경이라도 삼은 듯, 꽹과리와 장고 반주에 맞춰 울려 퍼지는 일노래 소리가 이들에게 어떤 경험으로 남게 될까? 유치원생들에게는 실로 경이로운 삶의 한순간이었을 것이다. 마치 탯줄을 자르고 나온 아이가 엄마의 품에 처음 안기는 경험을 하듯, 장차 쌀과 생명의 이야기로 이어질 무논에 들어가 고사리손과 고사리 발로 질퍽한 흙을 밟고 모를 심는 경험이라니.



망종(芒種)과 단오(端午), 모내기의 역사



삼국지 위지 동이전, 이를 축약한 후한서 동이전, 진서 동이전 등에 의하면, 마한에 54개의 소국이 있었다(삼국지 한전에는 55국, 후한서 한전에는 54국, 진서에는 56개국으로 나온다). 천군이라는 제사장을 세워 매년 5월에 씨를 뿌리는 작업을 마친 후에 떼 지어 노래하고 춤추며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나라에 부역이 있거나 성황을 수축할 때는 용감하고 건강한 사람들이 모두 등가죽을 뚫고, 거기에 굵은 새끼줄로 꿰어 막대기로 그 줄을 흔들며 하루종일 소리를 지르면서 힘껏 일하였으나 이를 고통이라 여기지 않았다. 활, 방패, 창, 노를 잘 쓰며 비록 싸우거나 전쟁을 하더라도 상대가 굴복하는 것을 귀하게 여겼다. 여기서 말하는 5월에 씨뿌리는 일이 바로 지금의 모내기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17세기 이후에야 이앙법이 활성화되니, 그 이전은 대부분 직파(直播)였다. 24절기로 말하면 망종이 그 시기다. 소만(小滿, 양력 5월 21일경)과 하지(夏至, 양력 6월 21일경) 사이에 든다. 대개 6월 6일 무렵이다. 그래서 보리는 익어서 먹게 되고 볏모는 자라서 심게 되어 망종이라 했다. 모내기에 관한 기록은 우리나라 최초의 농업서적인 농사직설(農事直設)에 나온다. 조선 세종 11년(1429)에 정초 등이 지은 농서다. 각 도(道)의 관찰사가 겸험 많은 농부들에게 들은 농사 지식을 모아서 엮은 책이다. 모내기를 한자말로 하면 이앙(移秧)이다. 이앙법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6~8세기 정도로 보고 있다. 중국과 일본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앙법이 본격적으로 농업에 적용된 것은 조선 중후기다. 대략 17세기를 중심으로 이앙법이 전국화되었다. 김태우의 “농경과 세시풍속의 상관성 연구, ��(정신문화연구 153호, 2018)에 의하면, 17세기 이후 이앙법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농사력에 변화가 생겨났다. 수경 직파(무논에 볍씨를 뿌려 심기)가 주류였던 조선 전기에는 단오를 전후하여 휴지기에 있었던 것이, 이앙법이 보편화 되면서 모내기가 한철인 농번기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여러 자료를 통해 분석하였는데, 평균적으로 망종이 단오보다 5~6일 앞서는 것으로 나타난다. 단오는 4대 명절 중의 하나였던 음력 절기이고 망종은 양력 절기다. 이 논문의 결론을 요약하자면, 직파 중심이던 시기에는 망종 무렵에 직파를 하고 단오에 먹고 마시며 놀이하는 풍속을 즐겼는데, 이앙법이 확산되면서 놀이할 만한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망종을 넘기며 모내기를 하는 지금의 풍속은 마한 시기로부터 이어진 전래 풍속 중의 하나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직파에서 볏모를 옮겨심는 모내기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매년 5월 씨를 뿌리는 작업을 마친 후에 떼 지어 노래하고 춤추며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풍경이 지금 현현하고 있다고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모내기 체험을 한 고사리손 아이들이 장차 자라, 흙과 물과 햇빛과 논의 생태를 알아차리고, 백로, 왜가리 가득한 이 아름다운 땅에서 기운 생동하게 살아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무안 학마을 들노래 연행과 모내기는 농촌체험의 매우 적절한 모델이다. 그래서 제안을 해두었다. 허수아비 만드는 날, 김매기 하는 날, 논두렁 베는 날 등 한 달에 한 두어 번 날을 정하여, 아이들부터 어른까지 전국의 사람들을 오게 하고, 마한으로부터의 풍속인 씨뿌리고 떼 지어 노래하며 춤추는 축제를 벌이자고 말이다. 이것이 명실상부한 법고창신의 현장이다.



남도인문학팁

무안 학마을 들노래의 지평

내가 상동 들노래를 만난 것은 수십년 전 한국민요학회 학술회의에서였다. 목포대학교에서 열렸던 당시 학술잔치에 무안 상동들노래 회원들이 특별 출연하여 노래를 했다. 메김소리와 받음소리가 맞물리고 장중한 소리와 추임새들이 얽히는 결 고운 노래였다. 단선율이면서도 복선율의 효과를 내는 남도 평야 지대 일노래의 특성을 고스란히 담아내던 노랫소리였다. 무안 상동 들노래는 2006년 전남 무형문화재 41호로 지정된 바 있다. 들노래 혹은 들소리라고 하는 일노래는 논이 많은 남도지역에서 특히 활성화되었다. 진도들노래는 남도들노래라는 이름으로 지정된 바 있고, 옥구들노래는 교과서에 실렸던 노래이기도 하다. 함평들노래, 나주들노래 외 이곳 무안의 상동들노래가 이름이 나 있고 경상도 일대의 예천 통명농요, 고성 농요 등도 이름이 나 있다. 무안상동 들노래도 이들과 비슷하게, 모찌기, 모심기, 논매기, 풍장소리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 뜨는 일을 모를 찐다고도 하는데 그래서 모 뜨는 노래 혹은 모 찌는 노래라는 이름이 붙었다. 모심기 소리는 줄여서 못소리라고도 한다. 모심는 소리는 긴상사소리와 잦은 상사소리로 나눈다. 논매는 소리는 무삼소리, 긴소리, 긴들래기소리, 잦은 들래기소리, 풍장소리로 나눈다. 세 벌 정도 김매기를 하면 장차 벼 베기 과정으로 들어가게 된다. 마지막 김매기 하는 것을 호미씻이 혹은 장원질 풍장소리 등으로 부른다. 제호소리라고도 한다. 김삼진의 연구에 의하면, ‘무상삼장’이라는 시조형(時調形) 노래가 상동 들노래의 특징이다. 하지만 지금은 들노래를 연행하던 회원들이 돌아가시거나 연로하여 이 풍속을 이어갈 만한 사람이 부족하다. 혹자는 남성 중심의 일노래에 여성이 참여하는 것이 풍습에 어긋난다고 말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농악이든 들노래든 무형유산 전승에 여성들이 많이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시대가 여성의 시대라는 점을 반영하는 한 풍경일 뿐이다. 장차 여성들이 보유자로 지정되기도 하는 등 보존과 전승의 주체로 활약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시대정신이다. 이 벼를 수확하여 브랜드 쌀로 포장하고 판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