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창·노영필>교육현장에 던지는 소크라테스의 일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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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창·노영필>교육현장에 던지는 소크라테스의 일갈
노영필 교육평론가
  • 입력 : 2024. 06.23(일) 18:24
노영필 교육평론가
해찰이 심한 학생이 수업을 방해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들릴 듯 말듯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수업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친구가 하는 대답에 끼어들어 훼방을 놓으면서 수업을 방해한다. 그렇게 방해해도 반응하지 않으면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수업의 흐름을 끊고 날카롭게 신경을 건든다. 수도 없이 경험하는 상황이지만 자칫 긴장하지 않으면 금새 휘말려 든다. 이럴 때 서로 기분 나쁘지 않게 접근하는 게 요령이다.

그중 하나가 강한 저지다. 즉 반전을 부르는 맨트를 던져본다.

“감동송까지 불러주다니 몹시 감사한가 봐요~?”

대부분 맥락을 아는 아이들은 ‘와~~’ 한다. “누구야 노래하는 사람!”이라 호통이라도 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감동적인 노래”로 긍정하니 반전이다. 지적질이 아니라 정반대의 칭찬으로 허를 찌른 것이다. 대부분 버릇없이 끼어들거나 나서는 학생은 개념이 약한 경우다. 아이는 나름 교사와 라포가 좋다고 생각해 친근감을 불러오기 위한 호소일 수도 있다.

윤리적으로 개념 있는 사람이란 이것과 저것의 가치를 구분하는 능력이 잘 갖춰진 사람으로 정의된다. 나와 너를 구분하고, 수업 시간과 쉬는 시간을 구분하는 능력이 그런 개념 짓기 능력일 것이다. 하지만 재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버릇없이 끼어드는 경우라면 나는 있고 상대방은 없는 무개념이다. 버릇없다는 말은 상대방을 이길 욕심, 나를 위하는 관심만 있는 지나친 자기중심이고 자기애일 수 있다.

대중교통을 타고 신발을 신은 채 다른 사람이 앉을 의자에 발을 올려놓았다고 하자. 이는 나만 편하자는 태도로 전형적인 개념 없는 무례다. 상대방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 것도 무례함이다. 수업이 싫은 자기 편의주의가 포개진다. 그래서 놀려고 훼방하는 학생을 이끌고 질서 있는 수업으로 넘어가는 일은 무례와 씨름하는 일이라 쉽지 않다. 호되게 꾸짖지 않고 만만한 교사로 분류되었다면 학생은 협력하지 않고 방해를 계속하기 쉽다.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그동안의 만만함을 한순간 회복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권리는 누리고 책임은 따지지 않는 경우를 바로 잡으려면 복잡하다.

요즘은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드는 것도 학생을 직접 끌어올 수 없다. 옛날에는 학생 이름만 불러줘도 행복해했지만, 요즘은 예를 들 때 사전에 양해나 동의를 구해야 한다. 선생님에 대해 아이들이 호불호를 분명하게 밝히는 세상인지라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자신을 미워해서 굳이 예로 들었다는 식의 민원까지 제기되고 있으니 아예 기계적인 사례를 가져오는 것이 낫지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이해심의 문제로 퉁칠 수 없는 시대다.

학교는 민원이 모든 질서의 기준이 된 세상이다. 그 이면에는 ‘너 자신을 알라’는 없고 ‘나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져라’만 있다. 민원으로 흔들린 학교의 균형은 중앙정부까지도 쩔쩔맬 정도가 되었다. 평가에서도, 수업에서도, 생활지도에서도, 민원이 될 수 있는 일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 물론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과도기적 현상일 수 있다. 하지만 더는 ‘너 자신을 알라’의 시대가 아니다. ‘나 자신을 알라’의 시대인 것이 분명하다. 나에게만 관심을 쏟는 시대다. 그래서 교사들은 악의 평범성 앞에 멈추고 만다. 도덕적 창의성을 고민하는 것은 피곤하다.

수업 내용 중 행복한 삶의 조건을 이루기 위해 민주주의의 발전을 꼽는 주제가 있다. 개념 없음과 반민주주의는 딱 맞아떨어지는 안성맞춤의 내용이다. 개념짓기는 민주주의 사회의 요체다. 더 풍부하게 개념짓기가 이뤄져야 한다. 죽어있는 교육은 교과서 내용을 그대로 정리하고 이해시키는 방법이겠지만 살아있는 교육은 현실적인 사례를 가져와야 흥미진진해진다. 그래서 가능한 한 개념과 씨름해야 한다. 공부에서 중요한 것을 정리하는 것도 개념이요, 윤리적인 선 긋기도 개념짓기가 핵심이다. 그 개념을 만드는 교육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뜻에서다.

개인을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개인이 주인의식을 갖도록 칭찬의 반전을 통해 오히려 ‘나는 왜 사는지?’, ‘나는 왜 양보해야 하는지?’, ‘나는 왜 개념을 가져야 하는지?’ 끝없는 성찰이 필요하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생활 속으로 끌고 와 녹여내지 못한 것이 문제다. 내 잇속을 위해 주장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의 제도가 한쪽으로 힘이 쏠리지 않도록 하는 역할도 중요하다. 아무리 말로 설명한들 몸에 배지 않은 습성은 행동의 변화를 만들 수 없다.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일갈은 궤변을 일삼는 소피스트들을 겨냥해 던진 말이었지만 이 시대의 어른이 되어갈 동량들에게 꼭 던지고 싶은 화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