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문화향기·김강>대한민국 정치인의 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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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문화향기·김강>대한민국 정치인의 완장
김강 호남대 영어학과 교수
  • 입력 : 2024. 03.26(화) 13:16
김강 교수
지난해 말 법무부 장관을 향한 야당 의원들의 막말로 정치적 갈등이 극단에 이르렀다. 장관의 무분별한 입을 겨냥해 “건방진 놈”, “어린놈”, “~같은 XX”, “금수” 등 거친 말이 쏟아졌다. 배움도 적지 않은 어른들이, 게다가 민의를 대표한다는 국회의원이나 국가 정책을 거드는 한 나라의 관료가 입에 담을 말들이 결코 아님은 분명하다.

이보다 훨씬 전 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감사 도중 기자들을 향해 “사진 찍지마! XX 찍지마! 성질이 뻗쳐서 정말”이라는 명대사로, 마치 전원일기 TV 화면으로는 도저히 성에 안 찬 듯, 모든 뉴스 사이트 구석구석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다시 한번 되새긴 문체부 장관도 있었음을 상기하면 정치인은 물론 정부 관료들의 설화는 콘텐츠도 다양하고 그 역사도 참 유구한 듯하다.

마침 이번에는 전직 국방부 장관이 그 대열에 끼어들었다. 그의 수상한 정치적 행보로 온 나라가 또 시끄럽다. 게다가 그는 전직에서 세운 훌륭한 공훈으로 이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한 외국 공관의 수장으로 영전했다. 문제는 그의 신분이 법적제재 대상으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수사 대상이라는 점이다. 속된 말로 피의자 혹은 용의자가 아니던가.

지난날 국방에 충직한 군인으로서 그의 공적이 무엇이었든 간에 오늘 그의 무책임한 처신이 대한민국 법체제는 물론 국가 기강마저 흔들고 있다. 언론에서 말하는 회피와 도피를 주도했다고 여겨지는 대통령실과의 은밀한 관계는 과연 무엇인지 공수처가 하루빨리 밝혀내야 할 것이다.

국민을 안중에 두지 않는 정치인과 관료의 오만한 자세는 자신의 인격 수준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은 물론 사회와 국가의 품격마저 훼손한다. 그들의 언행은 특히 정치적 은유라면 극도로 절제돼야 한다. 엊그제 한 야당 대표의 5·18 패러디도 무척 꼴사납다. 사익을 위해 불의의 희생자와 유족의 가슴을 ‘세 치 혀’의 비수로 다시 마구 찌르는 격이다.

그들의 부적절한 언행은 아마도 그들의 ‘힘’이 국민에게서가 아닌 정당이나 대통령의 ‘권력’으로부터 나왔다고 착각하는 데서 비롯됐을 것이다.

국회의원을 뜻하는 representative는 누군가를 ‘대표하는’ 자이지 우두머리가 아니다. 유사하게 장관이라는 우리말의 영어는 minister다. 사전을 보면 minister는 장관 외에 목사, 성직자라는 뜻도 있다. 동사로는 섬기다, 봉사하다, 보살피다는 의미다. 우리보다 앞선 미국과 영국에서는 minister라는 표현 대신에 ‘종복, 비서’라는 의미의 secretary를 장관의 호칭으로 사용한다.

단어 풀이에서 알 수 있듯이 장관이라는 자리는 기실은 왕이 아닌 백성을 섬기고, 그들에게 봉사하는 업무를 맡는 사람을 일컫는다는 점은 명백하다. 그러나 우리가 minister라는 권위적 어휘를 장관이라는 표기로 우선한 데는 중세 유교 사회에서 비롯된 양반과 관료 우월주의 사고방식이 여전히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윤흥길의 소설 ‘완장’은 졸부 최 사장의 눈에 띄어 저수지 감시인이 된 한 시골 마을의 종술이라는 건달이 자신이 저수지 관리자임을 내보이는 완장을 차고 다니며 동네 사람들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무모한 권력을 휘두르다가 끝내 파멸에 이른다는 이야기다. 완장으로 상징되는 미시 권력의 모순과 병폐에 관한 씁쓸한 풍자다.

이 소설에서 완장은 동네 사람들 각자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거대하든 소소하든 간에 권력의 표상이자 마을공동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수 있는 악마적 권력의 근원으로 제시된다. 한낱 껍데기 표상에 지나지 않은 완장을 착용하게 되면 갑자기 자신을 영웅시하여 권력을 남용하고 타인을 아래로 보는 풍토가 우리 주변에 만연하다고 소설은 고발한다.

완장 문화를 청산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표상하는 권력에의 욕망과 환상뿐만 아니라 완장의 권력적 속성이 끼치는 악영향 때문이다. 완장을 찬 자들은 명령적이고 강압적인 태도를 취하는 반면 완장을 차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허상의 권력임을 알면서도 쉽게 저항할 수 없는 공포에 빠진다. 이와 같은 심리적 거리감과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서로 진정한 대화가 단절되고 결국은 공동체의 일체감마저 붕괴된다.

공공이든 민간영역이든 완장 문화는 조직의 발전에 결코 이익이 되지 않는다. 완장 문화는 불필요한 권력관계를 생성함으로써 구성원들의 일체감을 깨뜨리고 신뢰의 기반을 좀먹어 서로 멀어지게 할 뿐이다. 구성원에게 진심으로 다가서지 못하는 권력은 이미 죽은 것이며 외면받기 십상이다.

어찌하여 영광스러운 완장을 차게 된 경우, 너와 내가 공히 똑같다는 생각을 하기 어렵다 할지라도 상대방의 처지와 입장을 우선 이해하고 수용하려 노력하는 포용과 겸손의 미덕 정도는 갖춰야 할 것이다.

요사이 다음 달 치러질 국회의원 선거로 동네마다 난리 북새통이다. 잘만하면 최소 몇 년에서 평생 누리는 직업을 얻는 판이니 우량종 선별에 따른 복종과 저항도 꽤 거칠다. 지역 민심을 대변하는 그들에게 ‘대여’되는 완장이 사유 권력의 안식처가 아니라 오만하고 부패한 정권을 견제하고 ‘위민보국’하는 진보의 토대로 거듭나기를 소망한다.

우리가 한 생애를 사는 동안 늘 소중하게 차고 다닐 완장은 성숙한 인격과 이타주의적 배려다. 능수능란한 정치적 술수와 기회주의적 보신주의가 절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