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김정숙 교수의 필름 에세이>인류는 왜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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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김정숙 교수의 필름 에세이>인류는 왜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을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오펜하이머
  • 입력 : 2024. 03.24(일) 14:57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오펜하이머’.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오펜하이머’ 포스터. 유니버설 픽쳐스 제공
지난 10일 열렸던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영화 ‘오펜하이머’가 굵직한 상을 휩쓸었다. 작품상은 물론 감독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촬영·편집·음악상에 이르기까지 7개 부문을 수상했다. 여기에는 감독-배우-기술력이 합쳐진 걸작이라는 평가가 잇따랐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대장장이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것 때문에 코카서스 산의 바위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형벌을 받는다.” 영화 ‘오펜하이머’의 프롤로그다. 천재 물리학자 오펜하이머(배우 킬리언 머피). 하버드 대를 졸업한 그는 학문적 욕구에 따라 영국 캠브리지 대와 독일 괴팅겐 대에서 태동하던 양자역학을 수학한다. 미국으로 돌아와 양자역학을 이입, 태동시킨 오펜하이머는 UC 버클리 대에 부임하여 인기 교수가 되고 학계에서도 양자역학과 천체물리학으로 명성을 얻는다. 그런가 하면, 연구원들의 노조결성 지지나 공산주의 모임에 기웃거리기도 하는데, 그의 지론은 어디까지나 과학자로서 편협되지 않은 이념과 사고체계를 열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배우 맷 데이먼)으로부터 비밀 프로젝트를 제안받는데, 그를 프로젝트로 몰고 간 것은 상황이었다. 첫째, 나치가 먼저 핵무기를 개발하면 인류에게 큰 위기가 닥친다는 것. 둘째, 이 연구가 성공했을 때 제2차세계대전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것. 그러나 한편으로는 3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물리학의 타락을 의미하기도 했다. 딜레마에 빠진 오펜하이머는 아인슈타인(배우 톰 콘티)을 찾아간다. 이 두 천재의 대화를 통해 원자폭탄 개발은 인류 자멸을 초래할 만한 대단히 위험한 선악과를 한입 베어 문 것마냥 돌이킬 수 없는 모험의 시작임을 알리고 있다.

결국 로스앨러모스 연구소를 맡게 된 오펜하이머는 마음껏 연구에 임한다. 3년간 20억 달러의 비용과 4000 명이 동원된 맨해튼 프로젝트. 그 결과는 ‘성공’과 ‘애국’이라는 환호인 동시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11만 명에 달하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결과이기도 했다. 열지 말았어야 할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버린 막중한 압박감은 과연 이를 주도한 한 물리학자만의 것일까.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파괴할 위험도 과연 인류는 감수할 수 있는 것일까.

영화는 처음부터 청문회 신을 도입하는 등 갈등 국면에 곧바로 진입한다. 1954년의 AEC(원자력위원회)의 오펜하이머 보안승인에 대한 청문회와 1959년의 AEC의장 루이스 스트로스(배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장관 인준 청문회가 영화의 주된 골격을 이루며, 그 사이사이를 오펜하이머의 전기적 일생으로 채우는 구도다. 여기에는 맨해튼 프로젝트가 객석에 전달되는 위력을 품고 있다. 오펜하이머의 청문회는 주제별 배경별로 쪼개놓은 듯 매우 다층적이다. 지루할 수 있는 전기를 몰입으로 바꾸어놓은 감독의 구성의도가 매우 노련하다. 과거 행동 하나하나가 적나라하게 발가벗겨지고 뜻하지 않은 죄목을 뒤집어 쓴 오펜하이머. 그 자신이 벗어나지 못한 두터운 죄책감을 발라내듯 감독은 이를 영상으로 은유 또는 직유한다. 한때 영웅처럼 대접하며 이용하다 정치적 견해(수소폭탄 연구 반대)가 다르자 죄를 씌워 퇴출하는 ‘토사구팽’이자 ‘마녀사냥’급 청문회. 미국의 20세기 말은 어쩌면 그리도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네의 크고 작은 사회와 똑같은 지….

다른 증인들이 몸을 사리는 것과 달리 힐 박사(배우 레미 말렉)의 증언 신이 매우 청량했다. 자신의 장관 인준을 확신하는 스트로스의 예상과 다르게 젊은 의원 J. F. 케네디의 인준반대 의사발언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았다. 이 두 신이야말로 보다 21세기 미국적이라는 개인적 생각이다. 영화 ‘오펜하이머’의 원작은 카이 버드와 마틴 셔윈이 쓴 전기 ‘American Prometheus’(2005)이다. 대장장이 프로메테우스가 형벌을 받듯 오펜하이머는 인류에게 필요하지만 동시에 위험한 것을 발명했다는 이유로 형벌을 감내해야 했던 것이다. 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