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비 기자 |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12일 서울에서 일어난 신군부의 반란을 막기 위한 9시간의 밤을 그린 영화다.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되고 비로소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가득 찼던 ‘서울의 봄’은 그날 밤을 기점으로 처참히 무너졌다.
12·12사태는 5·18민주화운동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전두환이 정권을 장악하고 이에 항거한 광주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 진압에 목숨을 잃었다. 광주에서 서울의 봄이 갖는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국방부 벙커를 지키다 반란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한 정선엽 병장이 40여년 만에 주목받게 된 것은 더욱 뜻깊다. 정 병장의 의로운 죽음은 영화 속 단 한 컷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파급력은 대단했다.
실제 인물이며 전남 출신 정 병장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지역민들의 관심이 쏠렸다. 정 병장의 모교 동신고등학교에서 ‘첫’ 공식 추모식이 열렸다. 수년 전 정 병장과 학창시절을 같이 보낸 동문 몇몇이 뜻을 모아 교내 한켠에 심은 정 병장의 기념식수 앞에 처음으로 국화 수십 개가 놓였다. 정 병장의 선배인 김병태 정선엽 기념사업회 추진위원장은 추모식에서 “2017년부터 조촐하게나마 동문들끼리 추모식을 해 오는 등 많이 노력했으나 공론화가 어려웠다”며 “만시지탄이지만 이제라도 추모식을 열게 된 것이 너무 기쁘고 고맙다”고 소회를 밝혔다.
정 병장의 죽음에 대한 국가 책임이 인정되기도 했다. 정 병장의 죽음은 총기사고로 은폐되다 2022년에서야 ‘순직’에서 ‘전사’로 바로잡혔다. 이와 관련 정 병장의 유족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지난 5일 서울중앙지법 민사202단독 홍주현 판사는 “유족 1인당 2000만원씩 총 8천만원을 배상하라”고 원고 승소 판결을 냈다. 오는 16일에는 정 병장의 모교 조선대에서 명예졸업장을 수여한다. 이 역시 여러 번 좌초됐던 사업이지만, 영화 흥행을 계기로 재추진됐다.
여러 긍정적인 변화가 있었으나, 전두환 등 책임자 단죄는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 정 병장의 동생 정규상씨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책임자들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사과 없이 세상을 떴다는 게 안타깝고 참담하다”며 “사과 한마디 못 들은 게 평생 한으로 남을 것 같다”고 말했다.
군인권센터는 지난해 말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무궁화대훈장 추탈 촉구 10만인 서명운동을 개시한 바 있다. 영화는 끝났지만 역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듯하다. 언젠가 영화의 결말과 다른 진짜 ‘서울의 봄’이 오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