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돈삼의 마을이야기>이순신 마지막 전투 출정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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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전남일보]이돈삼의 마을이야기>이순신 마지막 전투 출정한 곳
●완도 충무마을
소나무 사이 달 비치는 월송대
이순신의 시신 10여 일간 안치
충무사를 둘러싼 후박나무 숲
당시 조선수군 마신 우물 복원
제철 맞은 굴·매생이 겨울별미
삼도수군통제영 복원…둘레길도
  • 입력 : 2024. 01.11(목) 11:00
관왕묘비. 이순신과 진린의 활동상이 적혀 있다.
덕동마을에 복원되고 있는 삼도수군통제영 공사현장. 덕동마을은 약산대교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충무마을 풍경. 충무사와 이순신기념관을 품고 있다.
하늘에서 본 충무사와 월송대 풍경. 주변이 충무마을이다.
총소리가 울리고, 이순신이 두드리던 북소리가 끊긴다. 그것도 잠시, 다시 북소리가 울린다. 바다 위에서 치열한 백병전까지 펼친 전투는 조·명 연합수군의 승리로 끝난다. 하지만 대장선의 분위기가 침울하다. 군사들은 모두 엎드려 흐느끼고 있다. 이순신이 전사한 것이다.

처절한 전투가 끝나고, 이순신의 장례 행렬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상여를 본 백성들이 통곡을 한다. 뛰놀던 아이들까지도 장례 행렬에 시선이 멈춘다. 상엿소리가 구슬프다. ‘본영으로 가자, 고금도로….’

영화 ‘노량’의 마지막 장면이다. 영화의 대미가 고금도로 향하는 상여로 장식된다. 이뿐 아니다. 영화의 시작도 고금도였다. 이순신이 일본군과의 마지막 전투를 위해 출정한 곳도 고금도 통제영이었다.

영화를 보고, 고금도에 가고 싶었다. 고금도는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통제영이었다. 이순신은 고금도에 통제영을 설치하고 노량해전(1598년 11월 19일)을 준비했다.

노량해전은 순천왜성에 갇힌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를 구하려고 한밤중에 달려오는 일본함대를, 조·명 연합군이 노량에서 막고 싸운 전투를 일컫는다.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나라와 백성을 구하고 쓰러졌다. 노량에서의 승리를 끝으로 임진·정유재란 7년 전쟁도 막을 내렸다.

노량해전이 끝나고, 조·명 연합수군은 고금도로 돌아왔다. 이순신의 시신도 고금도의 월송대에 안치됐다. 노량에서 전사한 명나라 장수 등자룡의 시신도 함께였다.

이순신의 첫 무덤자리인 월송대가 고금도에 있다. 이순신을 모신 사당 충무사, 이순신과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의 행적을 담은 관왕묘비도 있다. 완도이순신기념관도 지난해 봄에 문을 열었다. 기념관은 고금도를 중심으로 한 이순신과 진린, 조·명 연합수군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고금도는 전라남도 완도군에 속한 섬이다. 고금도는 ‘남도답사 일번지’ 강진의 마량에서 고금대교로 연결돼 있다. 고금대교는 지난 2007년 개통됐다. 자동차를 타고 곧장 들어갈 수 있다.

고금도에 통제영이 설치된 건 1598년 2월 17일(음력)이다. 목포 고하도에서 이순신이 106일 동안 머물며 수군을 재건한 직후였다.

‘고금도로 진을 옮겼습니다. 고금도는 호남 좌우도의 내외양을 제어할 수 있는 요충지입니다. 산봉우리가 중첩되어 있고, 후망이 잇대어져 있어, 형세가 한산도보다 배나 좋습니다. 남쪽에는 지도가 있고, 동쪽에는 조약도가 있으며, 농장도 많습니다. 한잡인도 1500호나 됩니다. 그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선조실록’ 98권 ‘통제사 이순신 서장(書狀)’-

고금도가 남해에서 서해로 가는 길목이고, 다도해인 탓에 바닷길도 좋아 군사가 머물기에 맞춤이었다. 섬에 농사지을 땅이 넓어 군량미 걱정을 덜고, 순천왜성에 머물고 있는 일본군을 상대하기에도 좋은 위치였다는 얘기다.

조선수군 통제영이 고금면 덕동리에 설치되자, 진린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이 내려왔다. 7월 16일 고금도에 온 진린은 묘당도에 진을 쳤다. 묘당도는 지금의 고금면 충무리에 속한다.

묘당도는 당시 고금도에 딸린 작은 섬이었다. 조선수군 통제영이 설치된 고금도 덕동리와 지척이다. 지금은 고금도와 묘당도 사이 바다가 매립돼 한몸이 됐다. 간척은 일제강점기에 이뤄졌다. 주민들은, 일제가 이순신 흔적 지우기를 위해 간척을 했다고 의심하고 있다.

덕동(德洞)은 덕망있는 사람이 많이 산다고 이름 붙었다. 이순신의 본관인 ‘덕수(德水)’에서 따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충무(忠武)는 1971년 덕동리에서 따로 떨어져 나왔다. 본디 ‘용검도’에서 묘당도(廟堂島)로 바뀌었다. 관왕묘를 설치한 진린이 머물고 간 이후다.

고금도에 온 진린은 관우의 제사를 지내고, 명나라 수군의 안녕과 승전을 빌 사당을 지었다. 관왕묘(關王廟)다. 촉나라 장수 관우는 유비와 손권의 연합군과 함께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물리쳤다. 관우는 중국인에게 무인을 대표하는 성인이자 수호신이었다.

관왕묘가 사라진 자리에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 충무사(忠武祠)가 들어서 있다. 충무사는 처음에 탄보묘(誕報廟)였다. 1791년에 정조가 ‘큰뜻에 보답한다’는 뜻을 담아 편액을 하사하고, 이순신과 진린, 등자룡을 같이 배향했다.

일제강점 때 관우상과 위패가 훼손되고 제향도 중단됐다. 1953년에 충무사를 다시 지었다. 정전에 이순신을, 동무엔 당시 가리포진(완도) 첨사였던 이영남을 배향하고 있다. 이영남은 노량해전에서 순국했다. 충무사에선 해마다 4월 28일에 이순신 탄신제를, 11월 19일엔 순국제를 지낸다.

사당 한쪽에 관왕묘비가 남아 있다. 1713년에 건립된 묘비에는 관왕묘의 건립과 배경 등이 적혀 있다. 이순신과 진린의 행적도 담겨 있다. 글을 이이명이 짓고, 글씨는 이우항이 썼다. 높이 253㎝, 너비 93㎝의 묘비는 묘당도가 조·명 연합수군의 근거지였음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조선수군의 해상전투 대형을 그림으로 그린 우수영 전진도첩(戰陣圖帖)도 충무사에 보관돼 있다. 당시 전라우수영의 군사조직과 운영실태, 작전상황 등을 엿볼 수 있다. 전진도첩은 이순신이 만들고, 활용했다고 전해진다.

이순신의 시신이 10여 일 안치된 월송대는 충무사 앞 소나무 숲을 가리킨다. 월송대는 생전 이순신이 고뇌하던 바닷가의 작은 동산이다. 소나무 사이로 달이 비친다고 ‘월송대(月松臺)’다. 월송대에는 풀이 자라지 않는다. 주민들은 이순신의 기개가 서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이순신의 유해는 지금 충남 아산에 모셔져 있다.

충무사를 둘러싼 후박나무 숲이 아름답다. 나무에 붙어서 사는 일엽초가 눈길을 끈다. 숲 사이로 난 산책로도 멋스럽다. 당시 조선수군이 마셨다는 우물이 숲에 복원돼 있다. 숲은 바다와 맞닿아 있다. 이 바다를 누볐을 이순신의 기개를 그려볼 수 있다.

이순신이 누빈 바다엔 지금 양식시설로 가득하다. 굴, 가리비, 전복, 매생이 양식장이 보인다. 제철을 맞은 굴과 매생이는 바다가 키운 겨울별미이고, 바다가 우리에게 주는 보물이다.

굴은 섬사람들과 애환을 함께 했다. 소득은 고스란히 자식을 키우고, 공부를 시키는 데 썼다. 섬사람들은 바닷물이 빠지면 감태도 뜯는다. 감태는 씹을수록 단내가 난다고 ‘단김’으로 통한다. 매생이는 겨울 ‘효자’다. 일은 고되지만, 소득이 쏠쏠하다.

기념비 건너편, 약산대교 아래 바닷가가 덕동리다. 이순신과 조선수군이 머문 곳이다. 마을 뒤편 언덕에 삼도수군통제영을 복원하고 있다. 완도군이 추진하는 고금역사공간 활성화사업의 하나다. 통제영 외에 객사, 활터 등이 조성되고 둘레길도 만들어진다.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