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이돈삼의 마을이야기>이순신 장군 수군 재건, 노량해전 준비한 ‘용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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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전남일보]이돈삼의 마을이야기>이순신 장군 수군 재건, 노량해전 준비한 ‘용섬’
●목포 고하도
제주도와 울돌목 통하는 길목
명량서 대승 후 이순신 머물러
일제 陣地 동굴 10여 곳 남아
용 모습 능선길따라 트레킹 길
해상케이블카 다도해 조망 황홀
  • 입력 : 2023. 12.28(목) 13:08
고하도 용머리에서 본 목포대교. 대교는 북항과 신외항을 연결하고 있다.
눈 내린 고하도 포구와 마을 전경. 함박눈이 내린 지난 12월 22일이다.
섬의 능선을 따라가는 용오름길. 함박눈이 내린 지난 12월 22일 풍경이다.
용오름길에서 내려다 본 고하도 해안데크. 바닷가를 다라 나무데크가 깔려 있다.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흐르는/ 유달산 일등바위에 올라/ 거북이 등처럼 떠가는 섬들을 보라// 고하도 용머리를 휘돌아/ 삼색 깃발 나부끼며 귀항하는/ 고깃배가 끌고 오는 갈매기 떼를 보리….’ 김충경 시 ‘목포에 가면’의 앞부분이다.

유달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섬들 가운데 맨 앞자리에 선 섬이 고하도다. 고하도는 ‘용섬’으로 불린다. 섬의 생김새가 용을 닮았다고 이름 붙여졌다. 실제 섬의 지형이 용처럼 길게 늘어서 목포의 남쪽을 감싸고 있다. 목포로 향하는 큰 파도를 온몸으로 막아준다.

고하도는 목포시 달동에 속한다. 높은 유달산 아래에 있다고 고하도(高下島)다. ‘보화도’로도 불렸다. 북쪽은 바다 건너 유달산을, 동편은 영산강 하굿둑과 마주하고 있다.

고하도는 이순신도 사랑했던 섬이다. 명량에서 대승을 거둔 이순신이 수군을 이끌고 머물렀다. 1597년 10월 29일부터 106일 동안이다.

‘목포로 향하는데, 비와 우박이 섞여 내리고 동풍이 약간 불었다. 보화도(寶花島)로 옮겨 정박하니, 서북풍을 막을 수 있고 배를 감추기에도 아주 적합했다. 육지에 올라서 섬을 돌아보니, 지형이 매우 좋다.’ -1597년 10월 29일, 난중일기-

이순신에게 고하도는 최적의 군사기지였다. 해안선이 12㎞밖에 안 되지만, 제주도와 울돌목으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서남해와 내륙을 연결하는 영산강의 관문이기도 했다. 호남의 곡창지대를 지킬 파수꾼으로 맞춤이었다.

이순신은 고하도에 수군진을 설치했다. 군사들을 모아 전열을 가다듬고 훈련을 시켰다. 전선을 만들고, 군량미도 확보하며 일본군과의 전투를 준비했다.

이순신은 1598년 2월 16일, 수군진을 완도 고금도로 옮겼다. 고금도에 통제영을 설치하고, 일본군과의 마지막 일전을 벌였다. 고하도에서 수군을 재건하며 노량해전을 준비한 셈이다.

이순신의 지략은 유달산 노적봉 전설로 이어졌다. 이순신이 바위를 짚더미로 위장해 군량미처럼 보이도록 했다는 것이다. 노래 ‘목포의 눈물’에도 담겨 우리 민족의 슬픔과 고통을 달래줬다.

고하도에 이순신을 모신 사당 모충각(慕忠閣)이 있다. 해마다 4월 28일에 탄신제를 지낸다. 높이 227㎝, 폭 112㎝의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당시 상황이 비문으로 소상히 적혀 있다. 비석은 1772년 통제사 오중주와 이순신의 5대손 이봉상이 세웠다.

기념비는 수난을 겪었다. 일제강점 때 들어온 일본군이 넘어뜨렸다. 당시 일본군이 쏜 총탄 자국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금의 기념비는 광복 이후 주민들이 다시 세운 것이다.

조선수군이 머물던 진성(鎭城)의 흔적도 보인다. 진성은 길이 1225m에 이른다. 성벽을 쌓고, 일부는 지형과 바위를 이용한 산성이었다.

고하도에 ‘조선육지면 발상지비’도 세워져 있다. 한동안 마을 야산에 눕혀진 채 방치된 것을 다시 세웠다. 비는 높이 187㎝, 너비 62㎝에 이른다. 이순신 유허비가 있는 언저리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육지면을 처음 재배한 곳이 고하도였다. 1904년 목포 주재 일본영사에 의해 시작됐다. 임진왜란 때 조선수군의 기지였던 고하도에 일제에 의해 목화씨가 뿌려진 것이다. 육지면은 순백에다 올이 길고 섬유가 잘 꼬여 품질이 좋았다.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랐다. 수확량도 많았다.

고하도에서 재배된 육지면은 목포 전역, 나아가 전라도로 확대됐다. 목화솜은 목포와 광주, 군산 등지의 방직공장에서 면직물로 만들어졌다. 당시 목포는 쌀, 소금과 함께 목화솜의 수탈창구였다. 목포는 삼백(三白)의 고장으로 통했다. 고하도에 목화문화관이 들어선 연유도 여기에 있다.

일제의 흔적은 해안 동굴로도 남아 있다.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일제는 조선인을 강제 동원해 동굴을 팠다. 바닷가의 암반을 정과 폭약으로 판 동굴이다. 동굴에는 군인이 숨거나 ‘자살특공정’을 숨겨두는 장소로 쓰였다.

고하도엔 진지(陣地) 동굴 20여 곳이 있었다. 목포대교를 만들 때 절반이 사라지고, 지금 10여 개가 남아 있다. 일제의 감시와 채찍을 받으며 동굴 파는 작업에 동원된 선조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이순신이 머물다 간 300여 년 뒤, 그 자리에서 일제가 또 다른 전쟁을 준비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감화원도 여기에 있었다. 감화원은 소년 범죄자를 대상으로 한 교육시설이다. 실제는 고아들을 모아 황국신민으로 키운 인권유린의 현장이었다. 숙연해지는 것도 잠시,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다.

역사문화가 살아있는 고하도를 차분히 돌아볼 수 있는 트레킹 길이 단장돼 있다. 용의 모습을 한 섬의 능선을 따라가는 길이다. 모충각에서 용머리까지 3㎞, 왕복 6㎞에 이른다. 이름도 ‘용오름길’로 붙여져 있다.

숲길이 단아하고 호젓하다. 길도 평탄한 편이다. 탕건바위, 칼바위, 말바우, 용머리 풍광도 빼어나다. 길에서 내려다보이는 유달산과 다도해도 매혹적이다. 바다에서 물살을 가르는 크고 작은 배, 하늘에서 떠다니는 해상케이블카도 멋스럽다. 새소리와 바람소리, 파도소리는 덤이다.

목포 시가지와 다도해 풍광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도 있다.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13척의 판옥선 모형을 하고 있다. 용머리와 이순신 조형물이 설치된 포토존도 바닷가에 있다. 섬의 해안을 따라 놓인 해안데크도 고하도의 매력을 높여준다. 다도해를 뻘겋게 물들이는 해넘이의 장관이 펼쳐지고, 해안데크에 경관조명도 들어온다. 휘황찬란한 목포대교와 유달산 경관이 한데 버무려져 황홀경을 선사한다.

고하도에는 주민 100여 명이 살고 있다. 원마을인 고하리를 중심으로 섭두르지, 뒷도랑, 큰목에 모여 산다. 주민들은 예부터 갯벌에서 낙지와 바지락, 굴을 잡아 생계를 꾸렸다. 농지와 염전을 만들어 쌀과 소금도 생산했다. 영산강 하굿둑이 들어서기 전까지 그랬다.

영산강 하굿둑이 생기면서 바다 생태계가 크게 바뀌었다. 갯벌에 의지해 살던 주민들의 삶터도 무너졌다. 금호호, 영암호 등 화원반도의 물길까지 막히면서 더 이상 바다로 나갈 수 없게 됐다.

고하도가 활기를 되찾은 건 해상케이블카가 개통되면서다. 3230m를 운항하는 해상케이블카에선 목포 시가지와 유달산, 앞바다와 다도해를 다 조망할 수 있다. 케이블카는 고하도와 목포북항을 20분 만에 데려다준다.

고하도엔 자동차를 타고 들어갈 수도 있다. 2012년에 개통된 목포대교 덕분이다. 목포대교는 북항과 신외항을 연결하고 있다.

2024년은 용(龍), 그것도 청룡의 해이다. 용은 12지신 가운데 유일하게 존재하지 않는 동물이다. 우리의 상상 속에서 가장 멋지게 그려진다. 새해엔 ‘용섬’ 고하도가 용틀임을 하고, 승천하는 운이 함께하길 기대한다.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