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서석대>연판장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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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일보]서석대>연판장 정치
김선욱 서울취재본부 부국장
  • 입력 : 2023. 12.25(월) 14:13
김선욱 부국장
사발통문(沙鉢通文)이란게 있다. 어떤 일이 있을 때,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알리는 고지문(통문)이다. 그런데 통문의 모양이 특이하다. 사발(밥그릇)을 엎어서 그린 원을 중심으로 참가자들의 이름이 둘러가며 적었다. 순서대로 이름을 적지 않고, 빙 둘러서 적은 데는 이유가 있다. 주모자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다. 사발통문은 조선 후기에 농민 항쟁의 ‘도구’로 많이 쓰였다. 관에 항의하기 위해 각 마을마다 이를 돌려 사람을 모았다. 동학농민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고부민란 때 동학군의 통문 제1호가 사발통문이었다. 문서가 관에 발각될 경우, 누가 주모자인지 알 수 없게 해 ‘동지적 결합’을 도모했다.

서양에선 라운도 로빈(round robin)이란 용어가 있다. 스포츠 경기나 게임에서 각 팀이 다른 팀과 모두 최소 한 번씩 경기를 치르게 해 전반적인 승패 기록에 따라 마지막에 순위를 결정하는 경기 방식이다. 원래 서명자의 순서를 감추기 위한 사발통문식 청원(탄원)서에서 유래됐다. 반란이 교수형에 처해지던 유럽 왕조시대에 누가 먼저 사인을 했는지를 감추기 위해 원 안에 이름을 적었다는 설이다. 원형 서명 형태가 둥근 리본(round ribbon)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와 비교해, 연판장(連判狀)은 같은 의견이나 주장을 담아 연명으로 적은 문서이다.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연대 서명하고, 도장이나 지장으로 다시 확인한다. 연명으로 적은 게 사발통문과의 차이점이다. 1871년 흥선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했는데, 당시 유생들이 연판장 성격인 유통(儒通)을 돌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근 정치권에 ‘연판장 정치’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더불어민주당에선 이낙연 전 대표의 신당 창당에 반대한다면서, 국민의힘에선 지난 당 대표 선거 당시, 나경원 전 국회의원의 출마를 저지하기 위해서 연판장을 돌렸다. 그런데 양당의 주모자가 모두 초선 의원들이다. 당 혁신의 아이콘이 돼야 할 초선 의원들이 혁신 대상이 된 꼴이다. 당 지도부를 옹위하고, 내년 총선 공천장 앞에 줄서려는 행태라는 지적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당의 도덕성 문제, 보궐선거 패배 등 당내 비판에는 침묵하더니, 초선 다운 소신은 다 어디갔는지 싶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올드보이’들이 잇따라 출사표를 던지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