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안드레아 쉐니에> 중 1막 백작부인 파티장. 출처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 홈페이지 |
철학자 칸트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동물과 달리 순수 실천 이성을 소유하고 이를 이루기 위한 ‘자유’의 힘이라 역설했다. 역사에 등장하는 독재 세력의 항거 역시 말도 않되는 불합리를 인정하고 순응함이 아니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행동하는 양심’처럼, 저항 역시 인간이 추구하는 ‘자유의지’의 가장 강한 표출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르다노(Umberto Giordano, 1867∼1948)의 사실주의 오페라 <안드레아 쉐니에>는 프랑스의 위대한 시인으로 칭송된 실존 인물의 이름으로,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의 이상을 지지했으나 공포정치에 항거하다 왕당파로 몰려 단두대에 오르게 됐다.
<안드레아 쉐니에>는 당대 극작가로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루이지 일리카(Luigi Illica, 1857∼1919)의 대본으로 탄생됐다.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의 이상은 지지했지만 살벌한 광기에 저항하다가 희생된 시인 안드레아 쉐니에의 자유의지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1789년 시민들이 바스티유 습격으로 시작된 프랑스 혁명부터 대략 5년간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
오페라 <안드레아 쉐니에> 중 1막 백작부인 파티에서 쉐니에와 조우한 막달레나(1955년 막달레나 역의 마리아 칼라스) 출처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 홈페이지 |
풍랑의 역사 현장에서 고뇌와 갈등하는 인간 파멸의 서사를 보여주는 이 오페라는 실존했던 쉐니에의 업적이나 인간성을 잘 묘사하지만, 막달레나의 목숨을 건 사랑과 제라르의 존재는 대본가 일리카가 극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만든 설정이다.
막이 오르고 혁명 직전 테너역의 시인 쉐니에가 백작 부인의 초대로 파티장에 등장하고 백작 부인의 딸, 막달레나는 그에게 ‘사랑의 시’를 부탁한다. 하지만 쉐니에는 민중에 대한 동조를 호소하는 ‘즉흥시’를 낭송하며 파티에 참석한 귀족들에게 냉소를 받는다. 혁명사상과 민중을 사랑하는 쉐니에를 사랑하는 백작의 딸 막달레나, 하지만 쉐니에는 그녀에게 관심이 없다. 혁명의 시작 후, 공포정치 시대가 도래하고 귀족이었던 막달레나는 삶의 기반을 잃고 숨어 사는 처지가 됐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쉐니에의 공포정치를 비판하는 노선을 지원하고 그에게 익명으로 응원하는 편지를 보낸다. 혁명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은 사람도 있지만, 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사회적 지위와 재산을 얻은, 막달레나 가문의 하인 제라르도 있다. 어린 시절부터 막달레나를 흠모해온 제라르는 그녀를 찾기 위해 수소문한다. 그리고, 제라르는 막달레나가 쉐니에를 사랑하고 그를 지원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질투에 휩싸여 쉐니에를 죽이려 벼른다. 쉐니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체포되고 사형을 앞두고 있다. 고소장을 쓰는 제라르 앞에 막달레나가 나타나 그에게 쉐니에의 구명을 부탁한다. 막달레나의 진심이 통한 제라르는 쉐니에를 변호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그는 단두대로 향하게 된다. 그러자 막달레나는 사형을 앞둔 한 아이의 엄마를 대신해 이름을 바꾸고, 쉐니에와 함께 죽기를 다짐한다. 그리고 쉐니에와 함께 당당히 막달레나는 단두대를 향하며 이 오페라는 막을 내린다.
오페라 <안드레아 쉐니에는> 중 쉐니에를 구명하기 위해 제라르를 찾아간 막달레나.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 홈페이지 인용 |
혁명의 소용돌이에서 고뇌한 지식인들의 심리를 다룬 <안드레아 쉐니에>는 주옥같이 아름다운 선율의 노래로 구성돼 있다. 그 유명한 막달레나의 ‘어머니는 돌아가셨어요’는 격정적인 아리아로, 영화 ‘필라델피아’에서 OST로 사용되며 세계인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에이즈에 걸린 주인공 톰 행크스가 죽음을 앞두고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가 부르는 이 노래를 들으며 몰입하는 장면과 톰 행크스를 바라보는 덴젤 워싱턴의 모습은 정말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이다. 그리고 특히 곡 중 “나는 나를 사랑하는 모든 존재에게 불운을 가져다주는 사람”이라는 가사를 톰 행크스가 자신의 모습과 비유하며 아리아를 설명하는데, 필자에게는 가슴을 울리는 감동의 장면으로 기억된다. 이 곡 외에도 바리톤 제라르가 부르는 아리아 ‘조국의 적’ 또한, 심리적 격정이 휘몰아치는 곡이다. 그리고 테너역의 쉐니에가 단두대에 오르기 전 친구에게 들려주는 시 ‘5월의 아름다운 날처럼’은 너무 유명한 명곡으로 영화나 광고음악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의 2023 시즌 공연 장면. 출처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오페라극장 홈페이지 |
<안드레아 쉐니에>는 정의와 사랑이 가득차 있다. 막달레나의 죽음을 불사하는 사랑은 근래 영화나 뮤지컬에서는 볼 수 없는 너무 과한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다. 이 시대에서는 뜬금없고, 어리석게 보일 수도 있는 사랑, 우리는 오페라이니까 볼 수 있고 그런 명예로운 사랑에 환호한다. 계산 없이 자신을 내던지는 순수한 사랑, 작금의 시대 볼 수 없는 우리가 꿈꿔왔던 사랑을 우리는 멋진 화음으로, 감동적인 선율로 오페라 무대에서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극 중 제라르의 고뇌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보기도 하고, ‘행동하는 양심’ 자유의지를 표출하는 쉐니에를 보며 알 수 없는 숙연함과 동경을 보내기도 한다.
오페라 <안드레아 쉐니에> 중 재판을 받는 쉐니에. 출처 이탈리아 밀라노 라 스칼라 오페라 극장 홈페이지 |
명작 <안드레아 쉐니에> 같은 시대물이 성공할 수 있는 이유는 좋은 대본과 역사적 사건에 매몰된 작품이 아니라, 인간 감정의 선이 음악과 극을 지배하고 이들의 심리 묘사를 통해 역사의 사건을 볼 수 있게 했다는 극의 구조가 한몫했을 것이다. 230여 년 전 시대 전환의 혼란 속에서 극적인 심리 묘사가 세계인의 사랑을 받듯이, 광주의 정의와 사랑도 세계 오페라 무대에서 사랑을 받길 소원해 본다. 최철 조선대 초빙교수·문화학박사
◇명곡소개 : 영화 필라델피아를 보면 끊임없이 들을 수밖에 없는 마음의 보석상자에 넣어 둘만한 곡이다. 3막 잡혀 온 쉐니에의 고발장을 쓰는 제라르, 질투심에 사로잡힌 그는 잠시 머뭇거린 후에 서명하고 이어서 막달레나가 들어온다. 사랑하는 쉐니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그녀 자신을 다 바치겠다고 말하며 유명한 아리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어요(라 맘마 모르따·La Mamma morta)’를 부른다. 톰 행크스, 덴젤 워싱턴 주연의 1994년 영화 필라델피아의 OST나 1997년 EMI 레코드에서 발매한 ‘Maria Callas-The Voice Of The Century’에서 1950년대 전성기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오페라 해설집 등에서는 프랑스어 마들렌으로도 표기하는데, 오페라 오디세이에서는 이탈리아 표기 막달레나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