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탁인석 에세이스트 |
대마도는 그들의 자국임에도 일본인은 거의 찾지 않은 섬이다. 허지만 우리 한국 사람들은 대마도를 이웃집 드나들듯 찾는다는 것. 독도는 당연히 우리의 땅이지만 대마도 또한 우리의 영토가 될 뻔한 땅이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의 국토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우리네 역사에서 대마도는 오랜 세월 별로 달갑지 않는 기록이 더 많이 보유된 곳이다. 주로 전쟁으로 점철된 땅인데 나당 연합군에 맞서기 위해 이곳에 백제와 왜의 동맹군이 만든 쓰시마 카네다성이 있고 원나라의 공격을 당한 곳이기도 하다. 조선조의 세종은 이종무 장군에게 이 섬의 정벌을 명하기도 했고 임진왜란 때는 대마도가 조선 침공의 발판노릇도 했었다. 러일전쟁 때는 직접 교전지역이면서 일본의 승리로 한국에 고통을 준 아픈 지역이기도 하다. 어쨌든 대마도는 우리와는 제일 가까운 일본이어서 외국임에도 외국여행 맛이 나지 않는 곳이다. 지금은 자국보다는 한국 관광객이 주를 이루는 통에 우리와 더 긴밀한 공동경제지역이라고 할 정도이다.
대마도 인구는 3만이 채 안되지만 2018년에 다녀간 한국관광객은 41만 명이나 된다. 그런 관계로 한국과 일본 사이가 순조롭지 않으면 대마도는 울었고 관계가 좋아지면 대마도는 웃는다는 말이 있다. 대마도에서 한국인이 찾는 주된 관광지는 카네이스(金石)성터이거나 ‘덕혜옹주 결혼봉축비’이다. 허지만 이들의 역사를 제대로 인지하면 그 내용에서 민망한 부분이 많다. 관광 가이드는 이를 잘 안내하지 않는 형편이고 대마도 하면 무엇보다도 면암 최익현 선생을 떠올리게 된다.
가짜 뉴스가 판치는 요즘의 팬덤 정치에서는 면암 같은 정신력의 우국지사가 우리를 지키는 기준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면암은 불의한 일에는 절대로 소신을 굽히지 않는 이 나라 최후의 선비였다. 유념할 것은 면암은 평생에 유배를 3번이나 당했다는 사실이고 1833년 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불의 부정에 대한 강직성은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분이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를 비판하고 상소를 올려서 그의 정치적 실각의 계기를 만든 분도 면암이었다. 하지만 면암은 이것이 빌미가 되어 제주로 유배를 간 것이다. 제주도 유배에서 면암은 소백 안달삼 선생을 만나 학문적 교분을 쌓았고 후일 순창 거병의 발판을 마련한다.
다음 해에는 명성황후 정권이 일본과의 통상을 논의하자 이의 불가함을 역설하다 흑산도로 두 번째의 유배가 내려진다. 1904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이듬해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포고문을 올려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거부, 철도이용 안하기,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을 전개한다. 그리고는 74세의 고령으로 전북 태인을 중심으로 호남의병을 이끌고 순창에서 사력을 다하여 대항한다. 그러다가 일부러 전투를 져주고 잡혀가는데 이유는 조선 관군과의 싸움은 우리 민족끼리만 피해를 본다는 것이고 이로 하여 자진 체포되고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이때 21명이 그 뒤를 따랐는데 그중에는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이 된 김병로가 있었다.
대마도 유배지에서 제공하는 식사는 일본 주는 것이라 하여 일체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3개월 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대마도 소재의 수선사는 백제 때 비구니 법명이 지었다는 조그마한 사찰이다. 이 절에는 최익현 선생의 초상화가 모셔졌고 조그만 마당에 ‘대한인 최익현 선생 순국지비’가 우뚝하다. 선생의 초상화는 궁중화가 채용신의 작품인데 그가 탤런트 채시라의 고조부라고 한다. 우리는 면암의 비를 보고 울컥한 맘으로 묵념을 했다. 최익현은 을사늑약에 정면 반박한 대표적인 성리학자이자 선비였다. 최익현은 백척간두의 조국을 생각하며 고종과 대원군에게 상소를 올리고 거병을 하는 한편 자신의 온몸을 던져 국가를 지키려 했다.
최익현의 유해가 부산에서 논산까지 15일간을 이동하였는데 조선민중이 연도에 나와 모두가 울었다 한다. 지금은 대마도를 찾는 관광객조차도 수선사의 최익현을 지나치기가 일쑤다. 그러나 오늘의 대한민국은 최익현이 있어서 가능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필자는 이 자리를 빌어 대마도는 면암 ‘최익현의 섬’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리고 선생을 뵙기 위해, 아니 대한민국의 창성한 미래를 위해 대마도의 수선사 문턱은 하루가 다르게 닳아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