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진도 영등제 씻김굿 공연 길닦음 장면-김희태 제공 |
1974, 진도씻김굿 길닦음-이토아비토 촬영 |
씻김굿 길닦음거리, 송순단과 송가인(2012. 진도 지산 앵무리, 이윤선) |
“동서남북 간데 마다/ 형제같이 화목할거나/ 오영방에 깊이 들어/ 형제투쟁을 마다하였네/ 여래연불(염불)로 길이나 닦세/ 남무야 남무여/ 냄무아미탈 길이나 닦세/ 여비 옥여갖춰/ 출사성연 뭉연대리/ 이프거던 자야수는/ 마호밭을 매로가세/ 끝없는 호무를 가지고/ 이리 매고 저리 매자/ 새왕극락으로 드러나 매자~” -씻김굿 길닦음 거리 중에서-
위 길닦음에서는 형제의 사랑과 애증을 직설적으로 노래한다. 형제는 일반명사이기에 예컨대 제망매가의 죽은 누이와 살아 있는 나와의 관계다. 한 가지에서 난 형제이고 서방정토라는 사후를 공유할 사랑하는 사람이다. 기왕의 해석 “같은 나뭇가지에서 나고서/ 가는 곳 모르누나”를 “같은 나뭇가지에서 나고/ 가는 곳 모두어(모아) 지누나”로 고쳐 쓴 이유에 대해서는 지난 칼럼을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길닦음 노랫말도 불교 용어와 고사성어가 구전되면서 대개 와음의 형태로 정착되었다. 물론 수시로 재구성된다. 이런 맥락은 씻김굿 전반을 횡단한다. 사랑하는 사람이란 전제는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를 포괄한다. 길을 닦는 것은 극락왕생(새왕극락)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위해서다. 농사일에 비유하는 것은 길을 닦는 것뿐 아니라 어쩌면 잡초 무성할 어떤 공간을 매는 일이기 때문이다. 마호밭을 매기도 하고 끝없는 호미(호무)를 가지고 이리 매고 저리 매 나간다. ‘끝없는’ 호미는 ‘날카로운 호미끝’이라야 맬 수 있는 땅이 아니라 무딘 날로도 맬 수 있는 무형의 공간 곧 종교적 공간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왕생극락의 들이나(드러나) 매자는 청유가 그러하다. 노랫말의 용언(用言)과 행간을 살핀다. 극락 혹은 씻김굿 전반을 관통하는 중천(中千)이 들판으로 묘사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월명사가 피리를 불며 지나가던 ‘대문 앞의 큰길’이고 이 길을 이름한 ‘월명리’이기도 하다. 죽은 너와 산 내가 궁극에 이르러야 할 목적지이기에 호미로 매고 물로 닦아 깨끗이 하는 것이다.
“길놔라 배띄여라 새왕가자/ 배띄어라 극락가자 배놓아라/ 길매기는 어데 가고 배뜨는 줄 모르는가/ 사공은 어데가 배질할줄 모르는가/ 그 배 이름이 무엇인고 반야용선 분명코나/ 그 배 사공이 누이련가 인노왕 분명하오/ 팔보살이 호위하고 인노왕이 노를 젓어/ 장안바다 건너가서 김씨망제 신에성방/ 술법맏어 환생극락 가옵사네~” -씻김굿 길닦음 거리 중에서-
여기서 노래하는 길은 길(路)가 아니고 강(江) 혹은 바다(海)다. 길을 놓자고 노래해두고 다시 배를 띄우자고 노래한다. 왕생(새왕)이나 극락은 길(路)을 걸어서 갈 수도 있고 배(江/海)를 타고도 갈 수 있다. 길닦음 거리의 흰 베를 질베(길베)라고 부르는 것은 중의적으로 길배(路船)이다. 뭍길(道路)이 물길이고 물길이 뭍길이다. 월명사의 ‘큰길’이고 미타찰의 해후를 기다리며 닦는 길이다. 산골짜기와 물골짜기의 풍경은 갱번론과 물골론에서 여러 번 다루었지만 거듭하여 다루어 나간다. 길닦음의 길은 보이는 길과 보이지 않는 길 두 개다.
애인(愛人)을 향한 엘레지, 길닦음의 속내
엘레게이아, 그리스어로 시형(詩形)을 말한다. 피리를 반주 삼아 노래한 애도와 조위(弔慰)의 율격이었는데, 이것이 훗날 엘레지가 된다. 엘레지는 애가(哀歌)나 비가(悲歌)로 번역되지만, 훨씬 넓은 범주를 포괄하는 이름이다. 우리의 만가(輓歌) 혹은 상여소리의 본래 율격은 무엇이었을까. 오히려 탄가(嘆歌)라고 해야 본뜻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 개의 거시기를 말한다는 순 우리말 엘리지는 이 맥락과 다르므로 논외다. 이것은 얼레리 꼴레리와 엮어 따로 소개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제망매가」는 조선의 엘레게이아요, 씻김굿의 길닦음은 조선의 엘레지다. 이리 말하면 고명한 스님들은 화를 내시겠지만, 피리를 잘 불었던 월명사는 지금의 당골에 가깝다. 당골 중에서도 피리 젓대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화랭이’에 가깝다. 화랭이는 경상도 지역의 무당을 이르는 지역말로 남아 있다. 그 출처는 화랑(花郞)이다. 남도의 당골 또한 그 친연성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월명사는 해를 떨어뜨리기도 하고 달을 중지시키기도 하며 사랑하는 사람과 궁극에 만날 미타찰의 길을 닦아준다. 남도의 당골이나 경상도의 화랭이는 해나 달을 움직이는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길맞이(길매기)가 되기도 하고 사공이 도기도 하며 반야용선을 운행하는 인로왕이 되기도 한다. 이들이 길을 걷고 다리를 건너고 배를 타고 건너는 그 어디 즈음에 중천(中千)이 있다. 오랫동안 진도의 상장례를 통해 내가 주장해온 재생 관련 코드들이다(졸저, 『산자와 죽은자의 축제』 민속원). 얼마 전 김지하 1주기 생명 포럼에서 발표하면서 시김새와 흰그늘을 풀어 ‘다시나기’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꿔다가도 하는 지랄론, 갱번론, 물골론 등 십 수 개에 이르는 내 이론의 근거와 내력을 싸목싸목 풀어 쓴다. 출판의 기회가 오면 장차 큰 화두를 밝힐 예정이다. 씻김굿의 길닦음 절차는 향가 「제망매가」에 핍진(逼眞)한 의례이자 노래이며 신화적 결과물이다.
남도인문학팁
두 가지 행로, 도(道) 닦기와 길(路) 닦기
도를 닦는다는 것을 길 닦는 것과 애써 구분한다. 예컨대 행자승이 빗자루로 마당을 쓰는 일은 그저 길을 닦는 것이요, 면벽 수행 등의 고행이야말로 도 닦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은 다르다. 십우도(十牛圖) 중 마지막 그림은 소를 찾아 피리를 불던 목동이 소도 초월하고 나도 초월하여 마침내 저자거리에 스며드는 풍경이다. 왜 이 그림으로 깨달음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였겠는가. 저자의 민중을 제도하기 위함이라는 해석은 매우 오만하다. 만약 그렇다면 민심이 천심이라는 정언(定言)을 고쳐 써야 한다. 씻김굿의 당골과 별신굿의 화랭이들은 끊임없이 저자에 나앉아 미타찰의 오고 갈 길을 노래한다. 못다 한 사랑에 울고 이른 가을 낙엽처럼 떠난 ‘그대’를 노래하며 피리를 분다. 노랫말의 행간에는, 먼 곳으로 좋은 곳으로 가시라는 염원 만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에서 더 고운 모습으로 탄생(往生, 還生)하라는 주문이 빼곡하다. 마루 틈에 흩어져 박힌 쌀알처럼 촘촘하다. 길닦음은 가시는 님의 길에 뿌려진 진달래이며 다시 ‘그대’가 즈려밟고 올 진달래이다. 궁극에는 내가 가야 할 길이다. 길닦음에는 두 가지의 행로가 있다. 하나는 빗자루로 마당을 쓰는 닦음이요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왕생을 비는 닦음이다. 사랑하는 이를 위한 길닦음은 곧 미타찰에서 만날 나의 길을 닦는 일이기도 하다. 앞의 닦음이 단순한 마당 쓸기이고 뒤의 닦음이 도닦음인 것이 아니다. 모두 도(道)를 실천하는 행위이다. 그대 내 사랑하는 이의 왕생(往生)을 주문하는 노래이자, 기형도의 고백처럼 ‘추악하게’ 이승에 남겨진 나를 다듬는 도(道)닦기이다. 나는 오늘도 날 없이 무딘 호미와 허름한 피리 하나 들고 심중의 마당을 쓸고 맨다. 오뉴월 마당에 잡초가 지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