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대>아듀 팬데믹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서석대
서석대>아듀 팬데믹
  • 입력 : 2023. 05.07(일) 18:32
박상지 차장
‘감염병의 대명사’ 페스트는 고대부터 일정한 주기로 수차례 지구를 휩쓸었다. 페스트로 인한 팬데믹은 6세기, 14세기, 19세기 등 세 차례에 걸쳐 발생했다.

특히 페스트가 맹위를 떨쳤던 시대는 14세기였다. 당시 칭기즈칸이 세운 몽골제국의 군사·정치·경제적 활동은 페스트를 전파시키는데 촉매제로 작용해 전례없는 팬데믹이 세계적으로 발생했다.

유럽의 피해가 특히 컸다. 인구의 1/4에서 많게는 1/3에 이르는 수가 페스트로 목숨을 잃었다. 조반니 보카치오의 소설 ‘데카메론’의 서문에는 1348년 닥친 페스트의 공포가 잘 묘사돼 있다. 페스트가 맹위를 떨친 시기 피렌체 시내에서만 10만명 이상이 죽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누구나 살이나 겨드랑이 밑으로 가래톳이라 불리는 멍울이 생기면 순식간에 온몸으로 번지고 검은 반점이 나타나는데, 그러면 여지없이 사흘 이내에 죽고 만다는 것이다.

페스트가 할퀴고 간 마을은 참혹했다. 시신을 매장하는 속도보다 사람들이 사망하는 속도가 훨씬 빨라, 구덩이를 대충 파고 시신을 모아 던지는 식으로 수습해야만 했다.

중세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페스트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페스트는 유럽 근대화의 인큐베이터로 재평가 되고 있다. 페스트가 촉발한 급격한 인구변동은 비극적 재난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사회변혁을 낳는 마중물 역할을 했다.

명징하게 발전한 분야는 ‘출판’이었다. 페스트 팬데믹이라는 전대미문의 재난을 겪으며 생명·안전에 관한 대중의 관심과 욕구가 높아졌고, 여기에 인구감소로 인한 인건비 폭등이 맞물리면서 빠른 속도로 책을 대량 인쇄·제작할 수 있는 금속활자 발명과 지식혁명이 일어났다.

서민의 지위도 높아졌다. 일손이 부족해진 귀족과 영주, 거상들은 일꾼을 확보하기 위해 임금 인상과 처우개선을 내걸었다. 줄어든 남성 노동자의 자리를 여성들이 메우면서 여성 노동자의 수가 늘었고, 자연스레 여성의 지위도 향상될 수 있었다.

페스트를 없애주지 않은 신에게 실망한 이들은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당장 내일 죽을지 모르는 페스트의 공포 속에서 사람들은 더 과감해졌다. 무슨 일이든 일단 시도해보는 분위기는 르네상스 시대를 연 것이다.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유럽문화의 찬란함은 페스트 팬데믹에서 싹이 텄다.

최근 WHO가 코로나19 국제공중보건위기상황을 공식 종료했다. 2020년 1월30일 선포 이후 3년 4개월 만에 ‘비욘드 코로나’를 선언한 것이다. 페스트 팬데믹에 견줄만한 피해는 없었지만, ‘디지털사회’라는 패러다임의 전환은 확실해 보인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재편한 세계에 차분하게 연착륙하는 지혜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