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대>‘노동의 하향평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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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대>‘노동의 하향평준화’
이용환 논설위원
  • 입력 : 2023. 03.28(화) 17:44
이용환 논설위원
“엄중하고 긴급한 상황이다.” 1997년 12월 3일. 국제통화기금(IMF) 미셸 캉드쉬 총재가 급하게 한국을 찾아왔다. 아시아에 번지던 외환위기가 한국까지 밀려 오면서 우리 정부와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날 밤, 임창열 당시 경제부총리는 캉드쉬 총재와 IMF 구제금융안에 서명했다. 사실상 경제적 자주권을 상실한 것이다. “한국처럼 빨리 부자가 된 나라가 없었다. 또한 갑작스럽게 이런 굴욕을 경험한 나라도 흔치 않다.” 당시 과정을 지켜봤던 이코노미스트의 평가다.

IMF는 우리 경제를 살린 희망이었다. 국가 부도 직전 210억 달러의 긴급자금을 지원해 우리 경제를 극적으로 회생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가는 컸다. 정부는 1998년은 3개월마다, 그 다음 해부터는 6개월마다 정책 협의를 구실로 IMF의 ‘숙제 검사’를 받아야 했다. 온갖 굴욕적인 요구를 받아들였고 성장률부터 금리정책까지 모든 경제적 결정도 IMF의 승인이 필요했다. 기업의 생사여탈권도 가졌다. 실업·부도·신용불량 같은 절망적 상황에서 대다수 국민도 실의와 좌절에 빠져야 했다.

하지만 그것은 고통의 시작일 뿐이었다. ‘노동의 유연성’이라는 허울 좋은 편법을 들고 나온 IMF는 극심한 구조조정을 요구했다. 기업의 고용도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과 계약직, 파견직, 기간제 등으로 바뀌었다. ‘평생직장의 시대’도 사라졌다. ‘같은 일을 하면서 다른 임금을 받는’ 직장 내에서의 갈등도 극명하게 드러났다. 정규직이 줄고 그 자리를 비정규직이 채우면서 ‘노·노 갈등’이라는 신조어마저 생겨났다. 신자유주의에 따른 각자도생의 시대가 시작된 것도 이 시기부터였다.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오는 31일 ‘신학기 총파업’에 돌입한다. 이들이 파업에 나선 이유는 합리적인 임금과 근로시간이다. 속출하는 급식실 산재 등에 대한 해결책도 요구하고 있다. 급식실 종사자와 돌봄 교사 등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는 학교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일을 하지만 정규직이 아니라는 이유로 수많은 차별에 시달리고 있다. ‘쉴 권리(휴식권)’와 ‘적정임금 보장’은 헌법적 가치다.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특정 직군의 희생을 담보로 지탱되는 사회도 지속가능할 수 없다. IMF 구제금융이 시작된 지 올해로 26년. 위정자들이 강요한 ‘노동의 하향평준화’가 헌법의 가치를 훼손하고 학교를 지탱하는 이들의 노동 의욕을 위협하고 있다.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