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석대>내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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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석대>내조국
박상지 정치부 차장
  • 입력 : 2023. 03.27(월) 18:21
박상지 차장
민족분단의 질곡에 날것으로 부딪치며 한 편의 영화같은 삶을 살다 간 이가 있다. 지난 2013년 세상을 떠난 음악가 정추(1923~2013)가 그다.

정추는 자신의 태를 묻었던 광주에 육신도 잠들길 원했지만, 고국에서 내쳐져 머나먼 이국땅 카자흐스탄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 굴곡진 현대사만큼이나 그의 삶도 지난했다. 아흔의 생애 동안 국적이 다섯번이나 바뀐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월북해 평양음대 교수로 재직했다. 하지만 김일성 독재와 개인 우상화를 반대하다 결국 구 소련으로 망명했다.

유복한 집안 환경과 쟁쟁한 음악가들을 가족으로 둔 만큼 음악에 대한 그의 재능은 남달랐다. 그의 외삼촌은 당시 베를린음대 출신의 성악가였고, 형 준채는 1946년 좌·우 합작영화 ‘민족전선’을 연출한 감독이었다. 동생 근은 어린 시절 자주 흥얼거렸던 동요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이라는 곡을 썼다.

정추 선생의 개인적 업적은 상상 이상이다. 1961년 유리가가린의 우주비행 첫 성공을 축하하는 국가적 기념식에선 그의 곡 ‘뗏목의 노래’가 연주됐다.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에서 졸업 작품으로 작곡한 교향곡 ‘조국’은 심사위원들로부터 유례없는 만점을 받았다. 구 소련 음악가 사전에는 ‘차이코프스키 음악 계보의 4대 작곡가’로 기록돼 있다. 카자흐스탄 교과서에 실린 작품만 60여곡에 달한다. 칭송받는 음악가였지만 신분은 늘 불안정했다. 소련 유학 중 북한 학생들이 모인 자리에서 김일성 독재를 비판한 것이 화근이 됐다. 북한 당국은 소련 정부에 정추의 송환을 요구했으나, 소련은 대신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유배를 보냈다. 그리고 17년 후에야 그에게 공민증을 발급했다. 23년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13년은 북한 인민으로, 17년은 무국적자, 16년은 옛 소련 공민으로 살아온 그이지만 그가 작곡한 음악 300여곡엔 민족혼이 오롯이 서려 있다. 특히 그의 마지막 작품이었던 ‘내조국’은 궁상각치우 5음계만으로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절절히 표현했다. 대표작 ‘내조국’은 그의 꿈이기도 했다. 2013년 그가 눈을 감기 전까지 자신의 노래가 통일 조국의 애국가로 불리길 바랐던 것이다. 평생을 경계인으로 살아야 했던 정추선생이 태어난 지 올해로 100년이 됐지만, 그의 혼이 서린 ‘내조국’은 반세기가 넘도록 고국땅을 밟지 못하고 있다. 살아생전 고국에 정착하지 못했던 그처럼….

정추 선생 탄생 100주년을 맞아 생전에 그가 입버릇처럼 했던 “내 마음은 언제나 조국에 머물러 있었습니다”라는 말이 깊은 울림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