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바라본 이분법적 고정관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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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반
어느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바라본 이분법적 고정관념
전남도립미술관 ‘에이시-듀시’ 展
영상 신작 ‘기적을 만드는 중’ 공개
학교에서 겪은 훈육 트라우마 표현
장밋빛 방에 다채로운 회화작까지
  • 입력 : 2023. 03.20(월) 16:00
  • 도선인 기자 sunin.do@jnilbo.com
리처드 케네니 작/기적을 만드는 중/2023/8채널 비디오. 전남도립미술관 제공
이분법적으로 나뉜 세상에 균열을 내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출신 성소수자 작가의 전시회가 열려 눈길을 끌고 있다.

전남도립미술관은 오는 6월 4일까지 ‘리처드 케네디: 에이시-듀시(Richard Kennedy: Acey-Deucey)’ 전을 진행한다.

미국 출신의 리처드 케네디(Richard Kennedy·1985년 생)는 현재 독일 베를린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예술가이다. 음악, 퍼포먼스는 물론 회화, 영상 등 전방위적인 작업을 펼치며 파격적인 예술 형식을 제시하는 등 작가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전남도립미술관은 리처드 케네디의 작업을 선보여 현대 미술의 최신 경향을 제시하고 시각 예술뿐만 아니라 음악, 퍼포먼스 등의 종합 예술을 관객에게 선사하고자 한다.

리처드 케네디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출신의 성소수자로서 이분법적 사회 지배 구조와 고정관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특히 그의 작품은 흑/백, 남성/여성, 정신/육체, 스승/제자, 성공/실패, 사회/개인, 영속성/순간성 등 세상의 이분법적 고정관념과 가치 체계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동시에 이를 허물어 버리려는 시도다.

전남도립미술관은 이번 전시에서 신작 영상 ‘기적을 만드는 중(Miracle W.I.P)’과 더불어 20여점의 회화를 선보인다. 전시는 크게 세 개의 방으로 구분되며 방마다 특성에 맞는 색상으로 연출됐다.첫 번째 방에는 작가의 최신 영상 ‘기적을 만드는 중(Miracle W.I.P)’이 공개됐는데, 여덟 개의 모니터에서 리처드 케네디의 퍼포먼스 영상이 상영된다. 작가는 베를린의 집집마다 버려진 크리스마스 트리를 주워와 가상의 숲을 만들었다. 전시장은 칠흑처럼 어두운 숲속을 거니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든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는 자신의 두려움과 기대감을 표현했다. 이 작품의 모니터는 알파벳 ‘o’와 ‘h’처럼 보이게끔 배치되어 있는데, 이러한 모니터 구성은 감탄사 ‘오(oh)’인 동시에 자신이 유년 시절을 보낸 오하이오(Ohio)를 의미하기도 한다.

작가는 작품이 전시된 전시장 밖으로는 대조적인 흰 방을 배치해 전시장 사이의 ‘대비’를 강조하고, 사회의 이분법적 구조를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이는 흑과 백으로 구분된 삶을 넘어 하나의 기적을 만들자는 작가의 긍정적인 제안이 담겨있다.

두 번째 방은 학교의 교실처럼 꾸몄다. 작가 본인이 학교에서 받았던 거친 훈육과 모멸감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고자 퍼포먼스를 행하고 그 결과물을 전시장에 제시했다.

리처드 케네디 작/우유와 쿠키/2023/칠판에 백묵. 전남도립미술관 제공
작가는 몇 개의 커다란 칠판 위에 ‘나는 교실에서 주제넘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I will not speack out of turn in (class)’라는 문구를 빽빽하게 적고 지웠다. 관객이 문장 전체를 한 번에 읽을 수 없고, 조각난 단어들을 조합해 의미를 파악하게끔 의도했다.

가득 적힌 문구는 시키는 대로만 행하여야만 했던 교육 시스템에 대한 문제 제기다. 반복적인 학습에도 결국 개인의 개성을 지울 수는 없다는 예술가의 다짐이 깃들어 있기도 하다. 작품이 배치된 흰 전시장은 ‘계몽(enlightment)’ 즉 학생을 ‘빛(light)’으로 인도하려는 교육 현장인 동시에,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반짝이는 호기심을 의미한다.

마지막 방은 흑백의 구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창작의 기쁨을 관객과 공유하는 장(場)이다. 장밋빛 방에는 작가의 다채로운 회화 작품이 선보여진다.

특히 최근 작가는 커다란 몸짓으로 붓을 휘두르고, 그 흔적을 캔버스에 남기고, 다시 켜켜이 붓질을 추가해 이전의 행위를 덮는 퍼포먼스 요소를 강조한 회화를 선보이고 있다. 또 캔버스 조각을 천처럼 엮은 직조 작업도 선보인다. 자신의 ‘망친’ 작업을 잘라서 재구성한 것으로, 실패마저도 다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실천한다.

리처드 케네디는 지금까지 약 10여 차례의 개인전을 개최했고, 파리의 팔레 드 도쿄(Palais de Tokyo), 뉴욕의 페로탱 갤러리(Galerie Perrotin) 등 세계 유수 미술기관의 단체전에 초청받은 바 있다.
도선인 기자 sunin.do@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