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군 ‘장산도 3·18 만세운동’ 주도 장병준 선생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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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
신안군 ‘장산도 3·18 만세운동’ 주도 장병준 선생 기린다
주민들과 시위 이후 도피생활
상해 임시정부서 의정원 활약
1927년 좌우합작 신간회 활동
1960년 참의원 선거출마 고배
1972년 영면, 광주전남 사회장
  • 입력 : 2023. 03.16(목) 11:29
  • 신안=홍일갑 기자
포양 장병준. 유족 제공
신안 군민들에게 1919년 ‘장산도 3·18 만세운동’은 3·1만세운동 만큼이나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서남해 도서지역 대표적인 만세운동이어서다.

장산도 출신 포양(包洋) 장병준(1893~1972) 선생은 1919년 3월18일 장산도 주민들과 함께 일제의 국권 침탈에 항거해 만세운동을 펼친 날이기 때문이다. 무안(3월19일), 목포(4월8일) 만세운동보다 앞서 일어 났으며 신안군 농민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다.

신안군은 지난해 3월18일 장산면에 장병준 선생 위업을 기리는 ‘장산도 역사문화관’을 세웠으며 오는 18일에 장병준 선생을 기리는 행사가 열린다. 대한독립에 헌신했던 애국열사들을 추모하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편집자 주

18세기 중엽 해동지도에 나온 장산도
● 3월18일 주민과 만세운동 후 도피

1919년 3월18일 오전 10시. 장병준은 장산도 주민 수십명을 대리마을 사정(射亭)에 모아 놓고 연설을 시작했다. 서울에서 만세시위 소식을 전하면서 만세운동 동참을 호소하고 대열을 이끌고 주변 마을을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날 오후2시까지 만세 시위를 벌인 장병준은 김극태, 고제빈 등 주도자들과 함께 섬을 떠나 도피에 들어갔다.

목포경찰서장은 이틀 뒤 장병준을 주모자로 지목하고 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에 들어갔다. 당시 수배 내용이 흥미롭다. 사진이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인상착의로만 지목하고 있다. ‘안색은 희고 비만한 편, 둥근 얼굴, 큰 눈, 머리 모양은 하이칼라형으로 가리마를 타고 기타 특징은 없음.’ 장병준의 실제 외모와 완전히 다른 것으로 장산도 주민들이 일제 경찰에 터무니 없는 정보를 전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장병준은 3월23일 대전역에서 일행과 헤어져 서울로 간다. 나머지 일행이 도피를 위해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떠날 생각으로 하고 있던 반면, 장병준은 서울에서 활동을 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3월18일 시위, 치밀한 도피와 서울행, 서울에서 활동과 상해망명 등은 사전에 많은 준비를 했음을 보여준다. 장병준이 3월18일 이전 서울이나 다른 지역에서 만세 시위에 참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 상해 임시정부 비밀요원 활동

장병준은 1919년 4월 30일~5월13일 상해 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제4회 회의에서 한남수, 김철과 함께 전라도 대표 의원으로 선출됐다. 그렇다면 3월 23일~4월 말까지 뭘하고 있었을까. 어떻게 상해 임시의정원 의원이 될 수 있었을까. 장산도 시위를 주도했다지만 수 십명 정도가 참여한 소규모였고 오래 지속하지도 못했던 터다.

장병준 스스로는 이 의문에 답하지 않았다. 1920년 3·1운동 1주년 기념투쟁 이후 체포된 다음에도 그는 임시정부와 연결될 수 있는 사항은 인정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침묵했다. 그와 함께 1920년 투쟁을 주도했던 이동욱의 진술에 나타난다. 이동욱은 어떻게 장병준을 알게 됐냐는 일제 경찰의 질문에 “1919년 4월23일 대한국민대회가 조직됐을 때 자신은 대표 일원이었고 장병준은 간부 중 한 사람”이었다고 진술했다. ‘대한국민대회’는 3·1 운동 직후 이규갑, 홍면희, 한남수, 김사국 등이 준비해 4월23일 13도 대표자 24인이모여 ‘한성정부’ 수립을 선언한 모임이다.

이 무렵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하던 그룹 중 한 사람이던 이춘숙은 서울에서 국민대회 준비 그룹과 함께 통합 논의를 전개하고 있었다. 이춘숙은 장병준의 보성전문학교 선배로 1918년 일본 중앙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했으니 비슷한 시기 서울과 도쿄 유학생활을 함께 했던 터였다. 이후 임시정부에서도 장병준은 이춘숙, 홍진의, 한위건 등 함경도 출신의 유학생 그룹과 행동을 같이 했으며 이들 중 일부는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하게 됐다. 이런 경험은 장병준이 1920년대 송내호 등 사회주의자들과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며 신간회와 같은 좌우 연합의 민족통일전선에 참여하는데 계기가 됐다. 이춘숙, 홍도, 장병준, 한위건 등은 임시의정원에서 러시아령에서 조직된 국민의회와 통합도 주도하게 된다.

장병준은 만주와 시베리아, 국내 잠입해 독립운동 조직을 지원하고 임시정부와 연락을 담당하는 비밀 임무도 수행했다.

일제의 판결문에 따르면 대한국민회에서 장병준을 상하이 임시정부로 보내 조선 독립을 위해 노력하기로 약속하고 연락을 했으며 임정이 보낸 조선독립 관련 불온 문서를 배부했다. 박기영은 보성학교 출신 천도교도였으며 박기영, 이동욱과 연계되는 임정 인물은 장병준이 틀림 없다.

포양 장병준
● 1920년 3·1운동 1주년 유인물 배포 뒤 체포

장병준 행적이 공식적인 기록에 다시 등장한 때는 1920년 초부터다.

1920년 2월28~29일 서울, 대전, 대구, 마산, 목포 등 전국 각지에서 대한국민회, 혈성단 등 명의로 ‘경고문’이 뿌려졌다. 3·1 운동 1주년을 맞아 민족의 처지를 개탄하면서 상인과 학생들의 전면적인 봉기를 촉구하는 유인물이었다. 각지에서 용의자들이 체포됐다. 동아일보에서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를 지웠던 이길용과 암태도 소작쟁의 지도자였던 서태석도 포함됐다. 결국 주모자격인 이동욱, 장병준이 3월초 체포되면서 사건은 마무리 됐다.

의심스러운 건 장병준이었다. 이동욱보다 행적도 의심스러웠고 목포 경찰서에서는 장병준이 상하이 임시 정부와 관련돼 활동한 정황이 의심된다는 의견이 제출됐다. 비교적 늦게 체포됐던 장병준은 최대한 임시정부와 관련을 감추면서 나머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19년 신안군 장산도에서 열린 318만세운동 재현.
●1927년 신간회 목포지회 참여

1922년 석방된 이후 장병준은 표면적으로는 장산도에 학교 설립 운동 등을 추진하거나 하의도 농민운동 지지 표방 외 사회운동 참여 없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송내호가 조직한 독립운동 비밀결사 수의위친계에 참여하는 등 지역 민족운동과 유대를 맺고 있었다.

장병준이 다시 지역 사회운동의 중심으로 부상된 것은 1927년 신간회 목포지회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좌우 망라 민족 통일 전선인 신간회에 초기 임시정부 통합운동 중심이었고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자에 신망이 있던 장병준은 중요한 임무를 맡기에 가장 적합했다.

신간회 목포지회의 운영은 순탄치 못했다. 조극환과 서병인 간 갈등은 목포 지역사회 운동권 전체를 양분하는 파국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간사였던 장병준은 사태 수습과 활동 정상화를 주도할 수밖에 없었고 1929년 1월 지회장이 돼 전국대회에 참가하고 광주학생운동 진상규명에도 참가하는 등 활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1931년 신간회가 해산되면서 사회운동은 위축됐고 장병준도 더 이상 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지난 2019년 신안군 장산도에서 열린 318만세운동 재현.
●1960년 참의원 선거 출마 낙선…1972년 영면

해방 이후 장병준도 1946년 한민당 광주지부장, 전남도당 위원장 등을 맡는 등 정치활동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1946년부터 시작된 반탁운동에 참여하기는 하지만 좌우 통합에 주력했고 사위들도 좌익에 가담했던 그는 극단적인 좌·우 대결로 치닫는 정국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의지가 없었던 듯하다. 그가 정치활동에 다시 열정을 보인 것은 이승만 독재가 기승을 부리면서부터다. 1959년 민주당 전남도당 위원장에 선임된 그는 1960년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앞장 서는 등 민주화와 개혁에 나서기 시작했다.

1960년 민주당 소속으로 참의원 선거에 뛰어들었지만 낙선한 그는 이후 다시 정치판에 나서지 않았다.

1972년 3월16일 노 독립운동가 장병준이 별세했다. 대한광복회 전남지부가 중심이 돼 ‘고 포양 장병준 선생 사회장의위원회’를 조직했다. 3월20일 광주시민회관에서 열린 사회장 장례식에 당시 전남도지사, 전남도 교육감, 광주시장과 광복회 전남지회 회원과 시민 학생들이 참여했으며 운구 행렬은 군악대가 연주하는 가운데 금남로를 지나 영면의 길로 떠났다.
신안=홍일갑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