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의 묘역에 핀 매화. 매천 황현을 상징하는 꽃이다. |
매천 황현(1855∼1910)이 떠오르는 이유다. 황현은 매사에 진지하고 엄격했다. 현실을 직시하고 풍자한 문장가로, 시대를 생생하고 정확하게 기록한 역사가로 살았다.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의 선비로 살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대로 행동했다. 말과 행동에 대해서도 책임을 졌다.
일제에 의해 나라가 망하자, 선비의 자존심을 지키며 목숨을 던졌다. 문(文)과 사(史)·절(節) 세 봉우리를 한 몸에 갖춘 지조의 선비였다.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불린다.
‘내가 가히 죽어 의리를 지켜야 할 까닭은 없다. 단, 나라에서 선비를 키워온 지 500년이 됐는데, 망국의 날을 당하여 한 사람도 책임을 지고 죽은 사람이 없다.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냐.’ 황현이 절명시(絶命詩)와 함께 제자들에게 남긴 글의 일부분이다. 글 아는 지식인의 책임을 다하고자 했던 외침이다. 나라의 국권을 일제에 빼앗긴 1910년 8월, 그의 나이 56살 때였다.
황현은 광양에서 태어났다. 봉강면 석사리 서석마을이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슬기가 남달라 신동(神童)으로 불렸다. 29살 때 별시문과에 응시, 1등을 했지만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고 2등으로 밀렸다. 34살 때 식년시에 응시, 당당히 1등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성균관 유생생활을 마다하고 낙향했다.
낙향해선 구례 만수동과 수월리에서 살았다. 제자들을 양성하며 시를 쓰고, 역사를 기록했다.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매천야록(梅泉野錄)>과 <오하기문(梧下記聞)>이 그때 쓰였다. 매천야록은 1864년부터 1910년까지의 역사를 날짜별로 적었다. 우리나라 근대사 연구의 필독서로 꼽힌다. 오하기문은 동학농민운동의 발생과 진행과정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농민군의 포고문도 실려 있다.
황현은 기록에도 엄격했다.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비판을 했다. ‘매천필하무완인(梅泉筆下無完人)’이란 말이 나온 것도 그런 연유다. 매천의 붓끝에서 온전한 사람은 없다는 말이다.
매천 황현의 생가. 광양시가 2002년 초가로 복원했다. |
황현을 주제로 한 담장벽화. 황현이 소나무 아래에서 글을 읽고 있다. |
생가는 2002년 광양시가 초가 5칸으로 지었다. 안채의 이름을 ‘매천헌’으로 붙였다. 우물, 장독대, 정자도 복원됐다. 황현의 절명시 4수 전문이 입간판으로 세워져 있다.
매천역사공원에 있는 ‘절명시’비. 황현이 절명시 4수가 새겨져 있다. |
붓을 쥔 그의 손떨림이 글자 하나하나에 저며있다. 눈물은 또 얼마나 하염없이 흘렸을지…. 글을 아는 사람, 지식인의 책무가 절절이 묻어난다.
황현은 이 집에서 32살 때까지 살았다. 황현이 구례로 옮겨간 그 집에 김승옥 작가도 살았다. 김승옥의 할아버지(김수행)에서 손자 김승옥으로 상속됐다. 김승옥의 아버지는 여순사건 때 사망했다.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생명연습’으로 당선된 김승옥은 소설 ‘무진기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같은 집에서 황현과 김승옥, 두 지식인이 살았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마을을 감싸안은 백운산 문덕봉의 이름값에 어울리는 이야기다.
황현의 묘를 중심으로 매천역사공원도 만들어져 있다. 매화 활짝 핀 묘역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황현과 큰아들이 한자리에 누워 있다. 장수황씨 묘역이다. 묘역 앞에 사당 영모재가 있고 연못과 정자(창의정), 절명시비가 서 있다. 고 문병란 시인의 ‘매천송(梅泉頌)’이 헌시비로 세워져 있다. 황현의 일대기도 비문에 새겨져 있다. 비문의 글씨가 바래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옥의 티’다.
서석마을 전경. 마을이 백운산 문덕봉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
서석마을은 순천시 서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주민은 60여 가구 100여 명이 살고 있다. 벼농사를 주업으로 하고, 매실과 감?밤 등 과수를 조금씩 재배한다. 시설하우스로 애호박을 재배하는 주민도 있다.
“조용하고, 좋은 마을이죠. 이웃과 사이도 다들 좋아요. 교통도 편리한 곳입니다. 광양읍내 가깝죠. 순천시내 가깝고, 고속도로도 가까워요. 마을에 들어와서 살고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집 짓고 살 땅이 없습니다.” 송만종 서석마을 이장의 말이다.
“매천 선생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학생도, 어른들도 많이 와요. 서울과 부산에서도 버스를 타고 오는데, 마을에 버스를 댈만한 곳이 없어서 방문객들이 불편을 겪고 있습니다. 대형버스 주차장이 필요해요. 방문객들이 입고 선비체험을 할 수 있도록 유생복도 갖추면 더 좋겠습니다.” 송 이장의 바람이다.
유생복을 입은 어린 학생들의 얼굴을 그려본다. 옛 선비로 변신한 방문객들이 마을을 돌아보는 모습도 상상해본다. 산골에 활력이 넘칠 것 같다. 방문객도, 마을주민도 함께 웃을 수 있지 않을까.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남도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