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명장> "옷 만들기 가장 큰 행복… 시니어 패션쇼 열고 싶어"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경제일반
명인·명장> "옷 만들기 가장 큰 행복… 시니어 패션쇼 열고 싶어"
‘충장로의 보물’ 동구의 명인·명장을 찾아서||28. 정옥순 도미패션하우스 대표||60년 외길… 광주 양장계 산증인||옷짓던 모친 밑 바느질 기술 익혀||70년대 전성기엔 18시간씩 일해||의상실 침체에도 창작 즐거움 커
  • 입력 : 2022. 12.01(목) 10:34
  • 곽지혜 기자
정옥순 도미패션하우스 대표는 "평생 의상 디자인을 해올 수 있었던 가장 큰 동력은 창작 활동에서 즐거움을 찾는다는 것"이라며 "남아 있는 시간 안에 제 나이 또래들과 힘을 모아 시니어 패션쇼를 개최하고 싶다"고 밝혔다.

광주의 1세대 패션 디자이너는 첫인상부터 남달랐다. 모델도 아닌데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꼿꼿이 서서 멋스러운 원피스를 소화하며 자태를 뽐냈다.

1965년 문을 연 도미패션하우스의 정옥순 대표는 옷 짓는 일을 시작한지도 6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현역'이다.

자신을 뒤따라 의상학과 교수가 된 큰 딸과 매장 운영을 돕고 있는 둘째 딸까지, 이제는 손을 놓고 자신의 안식과 건강을 먼저 돌봐도 아무런 걱정거리가 없지만, 문제는 여전히 디자인을 하고 옷을 만드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다는 것이다.

정 대표는 자신을 옷 만드는 것 외에는 그 어느 것에도 소질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사업에도, 살림에도 참 소질이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그는 광주 양장계의 역사를 그대로 품고 있는 산증인으로 남았다.

오늘도 새로운 디자인의 옷을 고민하고 있을 정옥순 도미패션하우스 대표의 인생을 들여다봤다.

광주 동구 충장로5가에 위치한 도미패션하우스 지하 1층 작업실에서 정옥순 대표가 패턴 작업을 하고 있다.

● 어머니에게 배운 바느질 기술… 디자인 흥미

곡성에서 태어난 정 대표는 이북이 고향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어려서부터 옷을 짓기 시작했다.

옷 한 벌이 소중했던 시절이라 옷감이 해어져 구멍이라도 날라치면 똑같은 조각을 덧대 감쪽같이 짜깁기를 해냈다. 솜씨 좋은 어머니 밑에서 염색부터 바느질까지 익혀낸 정 대표는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광주로 향했다.

양장 짓는 기술을 배울 수 있던 양재학원도 1년여간 다녀봤지만, 어머니와 함께 군복을 뜯어 교복까지 만들 수 있었던 정 대표 눈에는 배울 것이 부족했다고 한다.

이후 학원 강사로도 활동하고 의상실에 취직을 해 패턴사로 일을 하다 당시 충장로 5가에 위치했던 테일러양장점을 인수해 운영을 시작했다.

정 대표는 "막상 양장점을 인수해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제가 옷만 만들 줄 알았지 사실 매장을 어떻게 운영해야 하고, 사업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몰랐던 것 같다"며 "그렇게 몇 년 시행착오를 겪고 지금의 도미패션을 시작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의상실이 전성기를 맞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는 정 대표의 도미패션도 밤늦게까지 불을 끌 수가 없었다.

새벽 5시에 출근해 밤 11시, 혹은 자정까지 옷을 만들었다. 10여명이 훌쩍 넘었던 공장 식구들도 하루 종일 함께 일했다.

정 대표는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이 일이 좋았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었지, 싫어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일하라고 하면 할 수 있겠냐"며 "원단만 수천여개였지만, 머리에 한번 입력한 순간 몇번째 칸, 혹은 어떤 매장에 있는 원단인지까지 줄줄 꿰고 있었다"고 떠올렸다.

지금도 정 대표는 지하 1층 작업실에 켜켜이 쌓인 수백여가지 원단을 모두 외우고 있다고 한다. 공장에서 어떤 원단이 필요하다고 하면 대번에 "그거는 지금 우리한테 없고 ○○ 원단사에 가면 몇 마가 있을 것"이라는 대답까지 곧바로 튀어나올 정도다.

정 대표는 "이태리니 영국이니 아무리 외국에서 좋은 원단이 쏟아져 나와도 저는 국산 원단이 최고라고 생각한다"며 "옛날에 '다우다'라고 전쟁 때 낙하산으로 쓰던 천을 구해서 옷을 지어 입었는데, 지금 이렇게 좋은 원단들로 옷을 지을 수 있다는 게 아직까지도 새삼스럽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광주 동구 충장로5가에 위치한 도미패션하우스 지하 1층 작업실에서 정옥순 대표가 직접 염색한 원단들을 소개하고 있다. 정 대표는 쌓여있는 수천여개의 원단의 이름과 위치를 줄줄 꿰고 있다고 한다.

● 의상실 침체에도 60여년 외길 인생

맞춤옷이 최고였던 시절을 지나 1980년대 들어서면서 공장에서 찍어내는 기성복들이 시장을 장악하며 광주에만 수백여개에 달했던 의상실도 점차 사라져 갔다.

정 대표는 "그때 많은 의상실 디자이너들이 기성복으로 사업을 전향했다. 저도 제안을 받고 서울까지 가서 공장도 둘러보고 시스템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는데 이건 아니다 싶었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는 "옷을 디자인 하는 것은 창작인데, 창작은 일단 내가 재미있어야 하고 손님들에게 딱 알맞은 옷을 해 입히는 것에서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낀다"면서 "하지만 찍어내는 기성복을 만드는 것은 저에게 돈을 버는 수단 외에는 어떤 의미도 찾을 수가 없었다"고 전했다.

다행히 그동안 정 대표에게 옷을 맞췄던 손님들 중 꽤 많은 사람들은 꾸준히 도미패션을 고집했다. 기성복이 넘쳐나는 시장에서도 정 대표가 만들어낸 옷들은 디자인 면에서도, 또 입었을 때의 편안함도 남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 대표가 디자인 작업과 손님들의 옷을 맞출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멋지고 아름다운 것도 좋지만, 손님의 체형에 맞아야 한다는 점이다.

정 대표는 "제 신조는 그 사람의 체형에 알맞는 옷을 만드는 것"이라며 "당연히 의상실이니까 맞춤형 옷을 만든다고 생각하시겠지만, 허리가 길고, 팔이 좀 짧고 하는 등 신체 특성마다 편안하게 입을 수 있는 옷의 특징이 분명히 있다"고 설명했다.

누구에게 배우기보다는 한벌, 한벌 옷을 만들며 디자인에 대해 공부해온 정 대표는 우직하게도 살아왔다. 패션업에 종사하면서도 유학 한번 가보지 못했지만, 몸소 익힌 디자인 기술로 지금은 사이즈를 재지 않아도 패턴을 뜨고 옷을 만들 수 있다고 한다.

정 대표는 "창작을 한다는 것 자체가 성취감이다. 오늘은 어떻게 해서 내일은 또 다른 디자인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매일 밤 잠에 들었다"며 "제가 자랑할 것이 별로 없는데 한눈팔지 않고 평생을 옷 만드는 일에만 열중해 온 부분은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정옥순 도미패션하우스 대표는 "20여년 전 패션쇼에서 선보였던 작품에 그림을 그려 재탄생 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 "80대 시니어 패션쇼 꿈꾼다"

60년 디자인 인생에 상을 준다고 하는 곳도, 인터뷰를 하자고 하는 곳도 많았지만 정 대표에게는 그 모든 것들은 자신이 말했던 '소질 없는' 일이었다.

대외 활동은 최소화하면서도 정 대표가 항상 욕심을 갖고 했던 것은 바로 패션쇼다.

정 대표는 "어디서 지원을 받지 않고 개인이 패션쇼를 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은 일인데, 패션쇼의 경우는 제 돈을 들여서라도 어떻게든 하려고 했다"며 "지금이야 나이를 많이 먹었으니 죽기 전에는 제가 전해줄 수 있는 것도 많이 전하고, 또 의상 디자인을 하고자 하는 학생들이나 후배들이 있다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활동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의 곁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는 두 딸은 정 대표의 든든한 동지들이다. 큰 딸 장소영씨는 호남대 의상학과 교수로 교육자의 길을 걷고 있지만, 어머니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정 대표는 "큰 딸은 제가 고등학교 때부터 시장에 데리고 다니면서 원단을 같이 봤다"면서 "지금도 서로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어보고,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은 '엄마 이건 아니다'며 강단 있게 말할 줄도 안다"고 말했다.

둘째 딸은 피아노를 전공하다가 그만두고 역시 의상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정 대표를 도와 도미패션하우스를 함께 운영하고 있다.

정 대표는 "딸들은 지금도 제가 몸이 조금만 좋지 않으면 일을 그만두고 이제 좀 쉬라고 말한다"면서도 "그럼 저는 '너희들이 내가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알려주면 그만할게'라고 대답한다. 사실 이 일 아니면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걸 알고 하는 소리다"고 웃어 보였다.

그런 그가 마지막으로 이루고 싶은 꿈은 정 대표 자신의 나이 또래인 70~80대 모델들을 주축으로 한 시니어 패션쇼다.

정 대표는 "20여년 전에도 한번 시니어 패션쇼를 진행했었다. 제가 만드는 옷들이 중년층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만큼 제 나이에 맞는 모델들로 구성된 패션쇼를 선보이고 싶었다"며 "나아가 70~80대 패션쇼는 더 어렵겠지만 이 일을 하는 동안에 꼭 끝마쳐보고 싶다"고 말했다.

곽지혜 기자 jihye.kwa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