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도 원망했던 선조…이제라도 한풀어 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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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가족들도 원망했던 선조…이제라도 한풀어 다행"
●신안 농민운동 현장을 가다||(3)근·현대 풍파의 현장 자은도||권력에 대항했던 자은도 소작쟁의||농민운동 진두지휘 '표생규 열사'||“할아버지 유품 없어 못내 아쉬워||밝혀지지 않은 피해자 도와줘야”
  • 입력 : 2022. 07.21(목) 18:12
  • 정성현 기자

지난 18일 신안군 자은면 사월포길에서 만난 표명식 씨가 할아버지 고 표생규 열사의 표창장을 들고 있다.

천사대교와 암태도를 지나 도착한 신안군 자은도(자은면).

'자애롭고 은혜롭다'라는 뜻을 가진 자은도는 이름에 걸맞게 아름다운 곳이었다. 주변의 산들한 바람은 연신 귓가를 스쳤고 눈 앞에 펼쳐진 바다는 마음을 편하게 했다.

그러나 이런 평화로운 모습과는 달리, 이 섬은 굴곡진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좌우 이념 갈등이 심했던 해방 전후, 일명 '붉은 3개월'이라 불리는 좌익의 민간인 학살 등이 이곳에서 자행됐다.

그에 앞서 1925년 12월에는 '자은도 소작쟁의'라는 항거의 역사도 발생했다. 일제 통치세력과 지주들의 강력한 탄압에 맞서 섬주민들이 목숨을 건 투쟁을 벌인 것이다.

●자은도 소작쟁의의 전개

자은도 소작쟁의는 암태도 소작쟁의 영향을 받았다. 암태도 소작인들은 1924년 8월 논농사에서 수확량 대비 소작료의 비율을 40%로 낮추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자은소작인회도 같은 해 10월 자은도 지주들에게 같은 조건을 요구해 합의에 성공했다.

그러나 자은도 핵심 지주인 문재철, 천철호, 나카지마 세이타로 등은 농업장려비를 교부하지 않는 등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이는 신안군에서 농민들이 '동시다발적 소작쟁의'를 벌이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됐다.

지주들은 소작인의 재산을 가압류하는 것으로 이들의 쟁의에 대응했다. 1925년 12월24일, 집행관은 다도농담회 사무원과 마름을 앞세워 소작인들의 집에 있는 벼와 곶감 1자루까지 남김없이 가압류하고 소작인의 지장까지 위조했다. 분노한 자은도민 수백여 명은 곤봉과 횃불을 들고 집행관을 쫓아냈다.

그러자 1926년 1월 전남 경찰부는 전남 각지의 경찰들을 비상 소집해 자은도로 파견시켰다. 이 과정에서 농민 4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약 40명이 검거됐다.

이 사실은 자은도에 파견된 경찰들이 섬의 교통과 통신을 차단한 탓에 곧바로 외부로 알려지지 못했다. 그러나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가듯 섬의 이야기는 육지로 퍼져나갔고 '목포와 서울의 사회단체가 자은도에 연대의 손길을 뻗었다', '일본의 유명한 사회주의자가 응원차 몰래 자은도에 들어와 잠복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사태가 전국적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경찰은 곧바로 중재에 나섰다.

그 결과 1926년 1월 자은도 지주와 소작인 대표가 협정을 체결했다. 내용은 논농사 수확량을 5:5로 나눠가지되, 지주는 자기 몫의 10%를 다시 소작인에 농업장려비로 교부한 다는 것이 핵심이다.

암태도 소작쟁의에서 확보한 40%가 아닌 지주들이 내세운 50%를 소작료율로 정한 것이지만, 농업장려비까지 계산하면 최종 소작료율은 45%로 절충됐다. 이로써 자은도 소작쟁의는 막을 내렸다.

그러나 쟁의가 타협점을 찾아 해결됐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지주들은 소작쟁의가 진행되는 동안 주도자를 '사회주의자'로 몰았다. 이에 구금됐다 석방된 사람들은 온 재산을 잃기도 했고 더해서 이웃과 가족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이들의 마음속에 난 상처는 시대가 흘러도 쉽게 아물지 않았다.

지난 18일 신안군 자은면 사월포길에서 만난 표명식 씨가 할아버지 고 표생규 열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자은도 소작쟁의 주역 '표생규'

이 같은 시련 속에서도 자은도 사람들은 갈등을 극복해 내려고 애를 썼다. 그들이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항일 운동의 주역'이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마음과는 달리, 지난 시간 동안 선조들은 항일운동가로서 인정받지 못했다.

신안군 자은면 사월포길에서 만난 표명식(84) 씨는 "나 홀로 싸워왔던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이제라도 선조들의 명예 회복이 이뤄져 다행이다"고 말했다.

그는 자은도 소작쟁의에서 농민운동가로 활동했던 표생규 열사의 손자로, 지난 수 십 년 동안 선조의 업적을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 결과 표 열사는 지난해 신안군 농민운동기념사업회를 통해 항일 농민운동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표씨에 따르면, 할아버지 표 열사는 지난 1925년 자은도 소작쟁의에서 일명 '아빠'같은 존재였다. 그는 수 십명의 젊은 농민 운동가들이 항쟁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여비와 식비 등을 책임졌다.

표씨는 "당시 할아버지(표생규)가 53세셨다. 그때로 따지면 굉장히 많은 나이였다"며 "그래서 그런지 목포를 가거나 밥을 먹을 때 모든 비용을 다 대줬다고 한다. 본인이 움직이기 힘드니 뒤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자처하지 않았나 싶다. 직책은 따로 없었던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어 "여기에 시도 때도 없이 끌려가고 벌금도 내니 빚이 엄청 생겼다. 우리 집안은 당시 (부의) 규모가 꽤 컸었는데, 항쟁 이후 가세가 많이 기울었다"며 "구금을 끝내고 돌아온 할아버지 모습은 폐인 그 자체였다. 마을 외곽에서 작은 아버지와 오두막집을 짓고 수 십 년 동안 그저 낚시만 하다 그렇게 돌아가셨다"고 회상했다.

이런 표 열사의 모습은 가족들에게 원망을 샀다. 특히, 표씨의 아버지는 이런 표 유공자의 얘기를 꺼내는 것조차 싫어했다.

표씨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하는 걸 싫어했다"며 "그날(농민항쟁) 이후로 굉장히 힘들게 살았다. 아버지가 어린 나이에 돈을 벌러 집을 나갈 정도였으니 할아버지가 얼마나 미웠겠는가"라고 설명했다.

이어 "아버지뿐만 아니라 고모 등 가족들도 할아버지를 좋게 보지 않았다. 오죽하면 나한테 '할아버지 명성 찾는 건 이제 그만 해라'고까지 했다"면서 "그러나 할아버지가 '유공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어떻게 그만할 수 있나. 명예를 되찾고 인정을 받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일평생 할아버지의 자손이여서 큰 영광이었다"고 덧붙였다.

표씨는 선조의 명예 회복이 너무나 반갑고 뿌듯하지만, 가장 아쉬운 부분이 '할아버지를 기억할 물건이 없다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들에 대해 국가 등에서 지원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표씨는 "지나고 보니 할아버지에 대한 모습이 점점 '가물가물' 해가는데, 이를 기억할 만한 물건이 없더라"며 "같이 살았던 작은 아버지가 유일하게 몇몇 물건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돌아가시고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챙겨놓을걸'하는 후회가 참 많이 든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래도 보람 있는 일을 하고 간 우리 선조의 역사를 나라에서 인정해 주고 기록해 줘서 너무 감사하다"며 "아직까지 명예 회복이 되지 않은 항쟁의 피해자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진실을 밝히는 데 제약이 있겠지만, 꼭 나라에서 이들을 도와 억울함을 풀어줬으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 이 취재는 지역 신문 발전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지난 18일 신안군 자은면 사월포길에서 만난 표명식 씨가 할아버지인 고 표생규 열사의 묘소를 바라보며 회상에 잠겼다.

고 표생규 열사의 표창장.

정성현 기자 ju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