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축예지계의 전략을 제시한 의병장 녹천 고광순
  • 페이스북
  • 유튜브
  • 네이버
  • 인스타그램
  • 카카오플러스
검색 입력폼
노샘의 남도역사 이야기
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축예지계의 전략을 제시한 의병장 녹천 고광순
임란의병 고경명·고종후·고인후 3부자의 후예||전라도 의병 선구자 녹천 고광순 창평서 거병||장성의 기우만·기삼연과 함께 호남 최초 봉기||지리산 연곡사에 ‘불원복기’ 세우고 의병 양성||지리산 근거지로 경남 일부까지 활동지역 넓혀||日軍 공격에 피아골서 순국, 황현 추모시 지어
  • 입력 : 2022. 03.30(수) 16:42
  • 편집에디터

고광순 부대가 사용한 의병기 '불원복기'

고광순 묘(대전 현충원)

녹천 고광순 의병장 초상화

창평 유천리에서 태어나다

호남은 임진의병에 이어 한말 최대 의병 항쟁지였다. 전라도는 1908년 일본군과 전투 횟수의 25%와 의병 수의 24.7%를, 1909년에는 전투 횟수의 47.2%와 의병 수의 60%를 차지하였다. 따라서 전라도는 어디도 의병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 시기 가장 돋보이는 활동을 한 분이 전라도 의병의 선구자로 불리는 녹천 고광순이다.

일제하 호남 8대 의병장으로 불린 녹천 고광순(高光洵, 1848~1907)은 1848년 창평현 현내면 유천리(현 담양군 창평면 유천리)에서 고정상과 광산 김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다. 창평은 임란 당시 부친 고경명과 함께 거병한 후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학봉 고인후(高因厚, 1561~1592)의 처가였다. 인후가 순국하자 그의 다섯 아들은 창평 외가에 맡겨진다. 창평고씨라 불린 인후의 후손들이 창평에서 터를 잡게 되었고, 인후의 사손(祀孫, 조상의 제사를 맡아 받드는 자손)인 고광순이 '가국지수(家國之讐, 집안과 나라의 원수)를 외치며 창평에서 거병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고광순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출중했고 행동은 신중했다. 그가 외조부로부터 학문을 익히던 중 종가의 양자로 가게 되자, 외조부는 "외손 4명 중 제일 똑똑이를 빼앗겼다"며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가 어떤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는지는 다음의 일화가 잘 보여준다. 그는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한다. 이때 척신이자 시관(試官)인 민응식이 고광순과 만나 인물됨을 살핀 후 수석으로 선발하겠다고 약속한다. 그런데 관서에 살던 사람이 돈 백만 냥을 뇌물로 바치자 고광순은 낙방하고 만다. 뇌물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광순은 민응식을 향해 "대감이 돈 백만냥으로 선비를 조롱한다는 말이요, 참으로 일전(一錢) 가치도 없소"라고 면전에서 부패한 시관 민응식을 꾸짖고 낙향한다. 그가 평생 과거를 포기한 이유다.

호남 의병의 출발을 알리다

고광순은 임진왜란 때 순국한 의병장 고경명·고종후·고인후 3부자의 후예답게 가풍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절의정신이 남달리 투철하였다. 48세 되던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이 일어나자, 녹천은 국왕에게 상소를 올려 "국사를 그르친 괴수를 죽여 국법을 밝히고 나라를 망치는 왜적을 빨리 물리쳐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하면서 을미사변의 원흉들을 단죄할 것을 통렬하게 주장한다.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장성의 기우만·기삼연과 함께 장성의병을 일으킨다. 호남 최초의 의병이었지만,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해산된다.

1906년 면암 최익현이 전 낙안군수 임병찬과 함께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거병하자 녹천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백낙구 등과 함께 구례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이 무렵 녹천은 고종으로부터 비밀리에 의병 봉기를 촉구하는 '애통조(哀痛詔)를 받고 토적복수(討賊復讐)를 맹세하고 있던 때였다.

녹천은 1907년 2월 남원의 향리 양한규와 연합하여 남원을 공격하기로 약속하고, 1월 창평 소재 저산(猪山)의 전주이씨 제각에서 의진을 결성한다. 당시 고광순 의진을 주도한 인물로는 고제량, 고광수, 고광훈, 고광문 등 창평면 유천리의 고씨들이었다. 하지만 고광순 의진이 남원에 도착하기 전 양한규 의진이 먼저 일어났다 패퇴함으로써 남원을 점령하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이후 고광순의 창평의진은 창평·능주·동복 등지를 전전하며 일제를 괴롭힌다. 일제는 고광순을 '호남 의병의 선구자', 혹은 '고충신'이라 불렀지만 눈엣가시였다.

1907년 9월, 고광순은 화력과 훈련 면에서 압도적인 일제 군경과 맞서 싸우는 방식을 탈피하기 위해 '축예지계(蓄銳之計)라는 새로운 전략을 수립한다. 축예지계란 장기 항전에 대비하여 일정 기간 예기(銳氣, 날카롭고 굳세며 적극적인 기세)를 기른 후에 전쟁을 불사한다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고광순이 찾아낸 최적의 의병 기지는 연곡사가 위치한 피아골이었다.

연곡사에서 순국하다

고광순은 의진을 이끌고 남원에서 곡성·광양·구례를 거쳐 지리산 피아골로 들어간다. 그리고 본영으로 삼은 연곡사에 마지막 국권을 상징하던 태극기에 '불원복(不遠復)'이라 적은 이른바 '불원복기'를 입구에 세워두고 의병들의 용기를 북돋운다. '불원복'은 주역 복괘(復卦)에서 '소멸했던 양기가 머지않아 회복된다'는 뜻으로 '멀지 않아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을 표상한 것이다.

고광순이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아 경남의 안의·하동·함양 등지로 활동 지역을 넓혀가자, 일제는 경남 진해만에 있던 중포병대까지 동원하여 진압에 혈안이 된다. 1907년 10월 16일 새벽, 일제는 광주에서 1개 중대, 진해만에 있던 중포병대 소속의 1개 소대, 진주경찰서 소속 순경 등을 총동원하여 연곡사를 포위, 사격을 개시하였다. 당시 고광순 의병 부대의 주력은 고광수와 윤영기가 거느리고 화개를 공격하기 위해 연곡사 본영을 벗어난 뒤였다. 고광순의 창평의진은 진력을 다해 응사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자, 고광순은 "한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는 것은 내가 평소 마음을 정한 바다. 너희들은 나를 위해 염려하지 말고 각자 도모하라"라고 말한 후 장렬하게 전사한다. 이때 녹천의 나이 60세였다. 임난 때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고경명의 나이도 60세였다. 315년을 간격으로 조상과 후손이 똑같은 나이에 의병으로 나섰다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순절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고광순 이하 25명의 의병이 죽고 다수가 부상당한다. 일제는 전투가 종료된 후에 연곡사와 문수암을 소각한 후 철수한다. 하지만 피아골에서 군부(軍簿)와 불원복기를 들고 피신한 고광순의 부장이던 광훈과 광문 등은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여 구례·남원·곡성, 무등산 등지에서 항쟁을 지속했다.

일제는 연곡사를 남김없이 불태워버린다. 고광순과 고제량의 시신은 불타기 직전, 절 인근에 사는 임준홍이라는 농부가 거두어 승려들의 채소밭으로 옮겨 솔가지로 덮어 놓는다. 간신히 탈출했던 고광훈이 4일이 지난 다음 상포(喪布, 초상때 쓰는 포목)을 준비해 연곡사를 찾아 오열을 삼키며 시신을 거두어 절 부근에 임시 봉분을 만든다. 그 초라한 봉분에 사람을 동원해서 흙을 더해 부은 분이 매천 황현(黃玹, 1855~1910)이다.

고광순은 순절한 다음 해인 1908년 4월, 문중의 결정에 따라 월봉산 기슭의 의열공 고인후의 묘소 오른쪽에 안장된다. 그의 시신이 통과하는 고을마다 사람들이 바라보고 줄지어 서서 애석해하며 눈물을 뿌렸고, 제문을 지어 술잔을 올리기 위해 곳곳에서 영거(靈車, 관을 실은 수레)를 멈추게 하였으므로 운구 기간이 예상보다 많이 걸렸다. 고향 땅에 도착한 날에는 인근 고을의 선비가 찾아와 재배하고 통곡한 수효가 인산인해를 이룬다. 녹천에 대한 지역민의 뜨거운 사랑이었다. 2012년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하였다.

매천 황현, 추모시를 짓다

절명시 4수를 남기고 목숨을 끊은 당대 최고의 우국지사 매천 황현과 녹천 고광순의 관계도 아름답다. 황현보다 7년 연배인 고광순이 황현을 처음 만난 것은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던 1894년, 황현이 거처하던 구례군 간전면 만수동에서였다. 고광순의 약전(略傳)을 쓴 매천은 첫인상을 "늠름했으며, 좌절하지 않은 기상이 있었다"고 서술했다.

두 번째는 간접 만남이었다. 지리산 피아골 연곡사로 근거지를 옮긴 고광순은 사람을 보내 더 많은 의병을 모을 수 있도록 심금을 울리는 격문을 하나 써 달라는 청을 한다. 이에 황현은 "오늘날의 일은 격문이 필요하지 않으니 오직 노력하여 재차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하라"면서 완곡하게 거절한다. 그 거절이 마음에 걸린 황현은 그날밤 격문을 썼지만, 고광순이 다시 오지 않아 건네주지 못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연곡사에서 고광순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단순에 달려가 무덤을 만들어 주고 순절을 애도하는 다음의 추모시를 남긴다.

연곡의 수많은 봉우리마다 숲은 울창한데/ 평생 나라 위해 숨어 싸우다 목숨을 바쳤도다.

전마(戰馬)는 흩어져 논두렁에 누워있고/ 까마귀떼만 나무 숲 사이로 날아와 앉는구나.

나같이 글만 아는 선비 무엇에 쓸것인가/ 이름난 가문의 명성 따를 길 없네

홀로 서쪽을 바라보며 뜨거운 눈물 흘리니/ 새 무덤 옆에 국화가 향기를 품어 올리네.

고광순은 사후 황현 뿐만 아닌 뭇사람들의 기림을 받는다. 1958년, 구례군민들은 힘을 모아 연곡사에 순절비를 세웠고, 1962년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다. 그리고 1969년, 불탄 그의 생가터에 그와 창평의진을 기리는 포의사(褒義祠)가 건립된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