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발길 닿는 데마다 문화재… ' 살아있는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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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삼의 마을이야기
이돈삼의 마을 이야기> 발길 닿는 데마다 문화재… ' 살아있는 박물관'
나주 금남동마을 ||수원화성보다 2배 넓은 나주읍성||관찰사 집무처 '작은궁궐' 금성관||목사내아·나주향교·남파고택 등||나주 역사와 문화 생생히 간직
  • 입력 : 2021. 11.04(목) 15:41
  • 편집에디터

금남동 거리. 금남동은 곳곳이 문화재이고,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이돈삼

나주는 한동안 여행객들의 마음에서 밀려나 있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녔음에도 크게 단장하지 않은 탓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고대 영산강문화를 꽃피웠던 나주가 남도의 새로운 핫 플레이스(hot place)로 떠오르고 있다.

나주는 오래 전 전라도의 행정과 경제·군사·문화의 중심이었다. 983년 고려 성종 때 설치한 나주목(羅州牧)이 913년 동안 유지됐다. 이 기간 나주목사 306명이 부임했다. 나주를 '천년고도', '목사골'로 부르는 이유다. 나주는 북한산과 한강을 배산임수 지형으로 삼은 한양에 빗대 '작은 한양'으로 불렸다. 뒤로는 금성산을, 앞으로는 영산강을 두고 있다.

당시 나주는 인구로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혔다. 흥선대원군이 '나주 가서 세금 자랑하지 말라'고 했을 정도로 세금을 많이 냈다. 둘레 3679m의 나주읍성이 그 증표다. 면적이 97만㎡로 수원화성보다도 두 배 넓었다.

금남동 거리. 금남동은 곳곳이 문화재이고,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이돈삼

금남동 거리. 금남동은 곳곳이 문화재이고,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이돈삼

옛 나주읍성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지닌 '작은 궁궐'이 금성관이다. 금성관은 옛 나주목의 관아였다. 관찰사가 업무를 보고, 조정에서 내려온 사신들이 묵어갔다.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와 궐패를 두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예를 올리는 망궐례도 행해졌다.

금성관은 1470년대 후반 나주목사 이유인이 세웠다. 1592년 임진왜란 땐 김천일이 의병을 모아 출병식을 한 곳이다. 일제강점기엔 명성황후 분향소가 설치됐고, 내부를 고쳐 나주군청사로 쓰기도 했다.

서성문 전경. 나주에는 옛 읍성의 4대문인 동점문과 서성문·남고문·북망문이 복원돼 있다. 이돈삼

서성문과 성곽. 주변에 성곽까지 복원돼 옛 나주읍성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이돈삼

금성관. 옛 나주읍성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지닌 '작은 궁궐'이다. 이돈삼

정수루는 북이 매달린 2층 누각이다. 읍성의 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려줬다. 그 옆에 나주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나주목문화관이 있다. 나주목사의 행차 장면을 모형으로 실감나게 보여준다.

목사내아(牧使內衙)는 나주목사의 살림집이었다. 거문고 소리에 학이 춤을 추는 곳이라고 '금학헌(琴鶴軒)'이라 불렸다. 지은 지 200여 년 됐다. 일제강점기에 군수들의 관사로 쓰이면서 변형된 것을 복원했다. 관광객들이 하룻밤 묵는 숙박시설로 운영된다. 수령 500년 된 '벼락 맞은 팽나무'도 있다. 저마다의 소원을 들어주고,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나무다.

금성관. 옛 나주읍성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지닌 '작은 궁궐'이다. 이돈삼

금성관. 옛 나주읍성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지닌 '작은 궁궐'이다. 이돈삼

옛 읍성의 4대문, 동점문과 서성문·남고문·북망문도 복원됐다. 서성문은 동학농민혁명 때 수성군과 농민군의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남고문 광장은 80년 5월 민주화운동 때 나주 시위의 거점이었다.

나주천변에 자리한 남파고택. 남파고택은 전남도내 단일 건물 가운데 가장 큰 개인주택이다.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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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향교의 격도 높다. 앞쪽에 대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사공간을, 뒤쪽에 명륜당을 중심으로 공부를 가르치는 전묘후학(前廟後學)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전국의 향교 가운데 가장 큰 규모에 속한다. 불에 탄 한양의 성균관을 복원할 때 나주향교를 본떠 다시 지었다고 전해진다.

향교에 사마재(司馬齋)도 있다. 사마재는 생원과 진사 시험에 합격한 유생들이 공부하던, 요즘말로 특별반을 위한 공부방이다.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는 수령 500년 된 대성전 앞 은행나무, 수령 400년 된 명륜당 앞 비자나무도 기품 있다.

서성문과 성곽. 주변에 성곽까지 복원돼 옛 나주읍성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이돈삼

문화예술창작발전소 나비센터. 옛 잠사공장을 재생해 만들었다. 이돈삼

향교와 담장을 사이에 두고 나뉜, 복합문화공간 '39-17마중'도 별나다. 건물이 지어진 1939년의 정서와 문화를,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 2017년이 마중 나가 되살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기에 난파고택이 있다. 난파 정석진이 쓰던 정자를, 그의 아들 정우찬이 아버지를 기리려고 다시 지었다.

난파 정석진은 1894년 동학농민전쟁 때 농민군으로부터 나주읍성을 지켜낸 인물이다. 그 공로로 해남군수를 제수받았다. 이듬해엔 단발령에 반발해 을미의병을 일으켰다가 참수를 당했다.

한옥의 구들장과 툇마루, 일본식 기와와 창문, 서양식 방갈로를 가미한 집도 있다. 게스트하우스와 카페로 활용되고 있다.

기해박해와 병인박해 때 순교한 교인을 기리는 나주성당도 있다. 순교자들이 겪은 사면초가의 상황을 표현한 빈 무덤 형태의 경당이 눈길을 끈다. 청동으로 만든 순교자의 기도상도 있다. 까리다스 수녀회의 한옥도 독특하다.

밀양박씨 청재공파의 종가인 남파고택도 지척이다.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문간채, 초당채 등 8동이 남아 있다. 가장 먼저 지어진 집이 초당채다. 현재 이 집에 살고 있는 종손(박경중)의 6대조인 박승희가 1884년에 지었다. 안채는 고조인 박재규가 1917년에 지었다. 박재규의 호를 따 '남파(南坡)고택'으로 불린다.

남파의 집안사람들은 독립운동에도 앞장섰다. 고택의 사랑채를 지은 박경중의 증조 박정업이 1900년대 초에 만든 태극기가 3·1운동 때 사용됐다. 해방 이후 기념식에도 게양됐다. 태극기가 지금도 전해온다.

남파고택은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과도 엮인다. 당시 일본학생에게 머리채를 잡혔던 여학생 박기옥과, 일본학생들과 충돌을 일으킨 남학생 박준채가 이집 식솔들이었다.

'천년 목사고을'의 가온누리가 지금의 나주시 금남동이다. 옛 나주목의 행정치소인 나주읍성의 서부면에 해당된다. 오래된 골목과 나무, 집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긴 골목 '진고샅'과 보리를 타작하고 말린 '보리마당'도 옛 정체성을 간직하고 있다. 옛 금남금융조합 등 일제강점기 근대건축도 남아 있다. 금남금융조합 앞은 1929년 11월 27일 오일장에 맞춰 학생들이 시민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금남동은 오래 전 금성마을과 남내마을이 합해져 만들어졌다. 동쪽으로 금천면, 서쪽은 다시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남쪽은 영강동·송월동, 북쪽은 성북동과 접해 있다. 면적이 1158만㎡(350만평)로 넓다. 주거공간과 상가, 각급 기관·단체가 모여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였던 옛 나주역과 나주학생독립운동기념관, 나주공공도서관, 나주종합사회복지관, 나주배원협 공판장, 나주중·고등학교 등이 여기에 속한다. 옛 잠사공장을 재생한 문화예술창작발전소 나비(羅飛)센터도 있다.

금남동은 발길 닿는 데마다 문화재이고,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나주역사와 문화의 중심이다.

이돈삼/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

영산강과 어우러진 옛 나주읍성의 모형도. 나주목문화관에 전시돼 있다. 이돈삼

옛 나주역의 실내 전시관. 옛 역사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이돈삼

옛 나주역. 일제강점기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가 된 곳이다. 이돈삼

옛 나주목사의 살림집이었던 목사내아. 관광객들이 하룻밤 묵을 수 있는 숙박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이돈삼

옛 나주역. 일제강점기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진원지가 된 곳이다. 이돈삼

박경준 종손이 보여주는 남파고택의 태극기. 나주의 3·1운동과 해방 기념식에 쓰였다고 한다. 이돈삼

비자나무, 은행나무와 어우러지는 나주향교. 향교의 기품을 한껏 올려준다. 이돈삼

남파고택의 초당채와 장독대. 남파고택은 밀양박씨 청재공파의 종갓집이다. 이돈삼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