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행복한 나라 깨끗하고 투명한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국민권익위원회 누리집 첫 페이지에 적힌 문구다. 지난 3일 숨진 장성 모 고등학교 교무행정사 A(29·여)씨는 교육감에게 직접 신고할 수 있는 전남도교육청 고발시스템 대신 국민신문고를 택했다. 국민신문고를 관리하는 '국민권익위'라는 권위있는 정부기관에 청원을 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국민신문고를 통한 청원은 일반 민원과 다를 것 없이 처리가 이뤄지고 있다. 운영주체인 국민권익위는 신문고가 '민원 유통시스템'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작성자 신원 비공개가 원칙인데도, 해당 시스템을 이용하는 기관 담당자들에게는 모든 정보가 공개된다. 신문고의 기대 역할에 대한 부조화와 허술한 시스템이 선량한 공익제보자들을 두 번 울리고 있다.
● 믿었던 국민신문고의 배신
조선시대 백성들은 억울한 일이 있으면 대궐 밖 문루에 올라 신문고를 울렸다. 관청에서 해결 못할 일을 임금이 직접 듣고 잘잘못을 가려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이 같은 역사적 배경 때문일까. 국민신문고는 수차례 제기한 민원이 해결되지 않을 때 두드리는 최후의 보루처럼 여겨져 왔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국민신문고는 '민원 유통시스템'에 지나지 않는다. 신문고에 청원글을 올린다고 해서 운영주체인 국민권익위원회 등 상급기관이 민원을 들여다보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신문고 청원은 시스템을 통해 민원 처리를 맡을 기관으로 전달된다. 이 과정에서 국민권익위가 내용을 열람해 분류 작업을 하는 것도 아니다. 청원 작성시 민원인이 지정한 기관으로 자동 전달되기 때문이다. 신문고를 통했다고 해서 우선순위로 배정되지도 않는다. 해당 기관에 직접 접수한 민원들과 하등 차이가 없다.
다만 국민권익위는 조정 역할을 한다. 민원이 전달된 기관에서 다른 기관으로 미루는 일이 3회 이상 반복되면 시스템이 발견하고 조정 요청을 해온다. 이때 국민권익위가 판단을 내려준다.
국민권익위 관계자는 "민원인이 국민신문고에 민원을 신청하면서 처리기관을 지정하면 시스템상 해당 기관의 신문고 민원처리 화면에 자동으로 표출돼 접수·처리한다"며 "국민신문고는 '온라인 민원 유통시스템'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말했다.
신문고 역할에 대해 일반인과 국민권익위의 인식차가 존재하는 것이다.
● 표류하는 제보자 신원정보
이처럼 국민신문고를 통하면 관계기관이 좀 더 신경써서 처리할 것이란 생각은 일반인들의 착각일 뿐이다. 제보자의 신원도 기관의 분류담당자와 민원처리담당자에게 그대로 공개된다. 최악의 경우 고발 대상자가 신문고 청원글을 열람하는 자가 될 수도 있다.
이 같은 위험성은 국민신문고 청원이 접수되고 처리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일단 국민신문고에 공익제보를 하기 위해서는 본인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주소 및 연락처 등 인적사항을 제출해야만 한다. 해당 정보는 비공개가 원칙이지만, 민원처리를 위해 전달받는 기관의 분류담당자와 민원처리담당자에게는 예외다.
각 공공기관은 국민신문고 로그인을 통해 자신들의 기관에 들어온 민원을 확인하고 적합한 부서에 전달하는 분류담당자를 두고 있다. 민원 분류를 위해 민원글을 열람하는 해당 담당자는 거기 적힌 개인정보를 알 수 밖에 없다.
분류담당자가 민원처리담당자를 고르면 그 또한 국민신문고에서 해당 민원글을 열람할 수 있다. 개인정보는 이 담당자에게도 똑같이 공개된다. 기관 내 최소 2명이 민원인의 정보를 있는 그대로 접하는 것이다. 더구나 해당 기관에는 고발 대상자가 그들의 동료로 재직할 가능성이 높다.
모 공공기관 분류담당자는 "민원 공문을 출력하면 인적사항이 가려진 채 나오지만, 컴퓨터 모니터 상에는 이름과 연락처, 주소 등이 그대로 뜬다"며 "분류담당자나 민원처리담당자는 업무 과정에서 당연히 개인정보를 알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