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있을때 위대했던 그들. 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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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호의 음악세상
함께 있을때 위대했던 그들. 퀸
Queen ‘보헤미안 랩소디’ 영화 ‘스카페이스’-김기호의 음악으로 읽는 세상
외모 콤플렉스.인종주의 차별
향락에 빠지는 프레드 머큐리
돈에 집착하다 모든 것 잃는 토니 몬타나
  • 입력 : 2018. 11.15(목) 21:00
  • kjpark@jnilbo.com
영국 록그룹 ‘Queen’. 뉴시스
이른바 ‘브리티시 록(British rock)’을 대표하는 밴드 퀸(Queen)의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는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자치령인 잔지바르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이곳은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8세기에 무슬림들에게 쫓겨 인도로 망명한 페르시아인 조로아스터교 교도의 후손이었다.

프레디 머큐리의 개명 전 이름은 ‘파로크 불사라’이다. 그는 어린 시절 인도의 뭄바이로 보내져 10년간 기숙학교에 다녔다. 이때부터 ‘헥틱스(Hectics)’라는 아마추어 밴드에서 키보드를 연주하며 뮤지션의 꿈을 키운다. 1964년에 잔지바르에서 아랍인과 인도인을 규탄하는 운동이 일어나자 프레디 머큐리의 가족은 영국으로 완전히 이주하였다. 이 무렵 영국 시민권을 얻으며 영어 이름인 ‘프레드릭 불사라(Frederick Bulsara)’로 개명한다. 프레디는 프레드릭의 애칭이다.

1980년 5월,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던 피델 카스트로(Fidel Castro)는 쿠바의 마리엘 항을 개방했다. 표면상으로는 미국에 거주하는 쿠바 사람들의 가족상봉 허가가 목적이었다. 플로리다에 상륙한 12만5000여 명의 난민 중 상당수는 반 카스트로 지지자 등 정치범이었고 대략 2만5000명이 전과자였다.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영화 ‘스카페이스(Scarface)’속 토니 몬타나(알 파치노 분) 역시 당시의 난민 중 하나였다.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미국행 보트에 몸을 실었지만 난민지위를 얻지 못한 채 수용소로 보내진다. 범죄조직이 의뢰한 청부살인을 자행하고 그린카드(영주권)을 얻게 된 그의 꿈은 오직 부자가 되는 것이다. ‘기회의 땅’ 미국의 힘은 모두 돈에서 나오는 것이고, 부를 통해 그 힘을 얻는 순간 세상 모든 것을 갖게 될 것이라 믿는다.



프레디, 그리고 토니의 꿈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불세출의 록 보컬리스트 프레디 머큐리의 삶을 스크린에 그리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후 공항 노동자로 일하면서도 뮤지션의 꿈을 놓지 않던 프레디는 ‘스마일(Smile)’이라는 밴드로 활동하던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와 드러머 로저 테일러를 만나게 된다. 대학가와 클럽의 공연 등을 통해 조금씩 이름을 알리던 그들은 좀 더 큰 꿈을 꾼다.

가진 돈을 모두 털어 스튜디오를 빌린 후 자신들의 데뷔 음반을 준비하던 그들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세계적인 뮤지션 엘튼 존의 매니저였던 존 레이드는 퀸이 여타 밴드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묻고, 프레디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소외된 사회 부적응자들을 위해 노래하는 부적응자들의 밴드다.” 프레디 머큐리는 독특한 구강구조를 가졌다. 돌출된 상악은 발성의 공명을 극대화했고 이를 통해 분출되는 고음의 강렬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유리알처럼 차갑고 섬세하면서도 칼날처럼 날카롭고 파워풀한 보컬 능력은 그를 세계 최고의 스타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외모 컴플렉스에 시달렸고 영국의 인종주의는 그를 더욱 괴롭혔다. 록은 백인의 음악이라고 믿던 일부 영국인들은 그를 ‘파키(파키스탄 꼬마)’라고 불렀다. 프레디는 성(姓)마저 영국식인 ‘머큐리(Mercury)’로 개명하면서 인도 국적을 포기하지 않던 아버지와도 대립하게 된다. 그는 스스로를 사회부적응자라고 생각했고,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위해 노래하고 싶었다. 브라이언, 로저 등 퀸의 멤버들은 그의 꿈과 함께 했다.

1974년 발표한 싱글 ‘Seven Seas Of Rhye’와 ‘Killer Queen’이 히트하면서 이름을 알려 나가던 이들은 이제 공전의 음악적 실험을 감행한다. 프레디는 음반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페라와 록의 테마를 곡 전체에 녹여낸다. 녹음 과정은 파격적인 시도로 가득했고 영국 음악 산업 사상 최고의 비용이 투자되었다.

아카펠라로 시작하고 장엄한 오페라와 역동적인 록 사운드가 폭발한 후 아름다운 발라드로 매듭짓는 ‘Bohemian Rhapsody’는 상업적 우려에 봉착했다. 길이가 6분에 달하는 곡을 환영하는 방송사는 드물었고, 일부 매체는 ‘레드 제플린이 되고자 했지만 실패한 퀸’이라며 비아냥댔다.

그러나 이들의 ‘창조적 파괴’에 가까운 혁신적 시도는 찬란하게 빛을 발한다. 이 곡이 수록된 4집 ‘A Night at the Opera’는 그들을 세계적인 밴드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프레디 머큐리의 제안으로 제작된 ‘Bohemian Rhapsody’의 뮤직 비디오는 세계 최초로 기록되었고 유튜브 조회수는 지금까지 6억뷰를 뛰어 넘는다. “나는 스타가 아니라 전설이 될 것이다.”라던 프레디 머큐리의 꿈은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영화 ‘스카페이스’속 토니는 난민수용소를 벗어났지만 꿈을 이룰 길은 요원했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에도 쿠바 난민 출신의 토니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접시닦이 등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던 그에게 한 범죄조직이 접근한다. 그는 이미 가난을 벗어날 방법이 범죄와 살인밖에 없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타고난 배짱과 절박함만이 무기인 그는 여러 차례의 위기를 극복하며 보스의 신임을 얻게 된다. 그에 앞서 미국으로 이주한 어머니와 여동생은 공장과 미장원에서 일하고 있었다. 가난에서 벗어난 토니는 가족을 찾아가지만 어머니는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토니와 같은 범죄자들이 쿠바인 모두를 혐오하게 만들고 있다며 절규하는 어머니는 아들을 집 밖으로 쫓아낸다.

이제 토니에게 남은 것은 오직 부자가 되겠다는 탐욕뿐이었다. 그의 머리위를 나는 비행선에는 ‘The world is yours(세상은 너의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그는 돈만 있으면 세상 모두를 가지게 될 것이라 믿었다.



꿈을 이루고 불행이 시작되다

‘보헤미안 랩소디’에 이어 ‘위 윌 락 유’, ‘위 아 더 챔피언’ 등의 곡이 크게 히트하면서 퀸은 이른바 ‘브리티쉬 록’을 대표하는 밴드의 반열에 오른다. 하지만 상당수의 매체와 전문가들은 이들의 음악에 호의적이지 않았고, 특히 밴드의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에 대한 비판은 악의적이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영국의 인종주의가 있었다.

록 음악의 주류가 백인이라고 믿던 그들은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 인도계 파시족 출신의 뮤지션이 못마땅했다. 프레디와 절친했던 친구 엘튼 존은 “만약 프레디 머큐리가 영국에서 태어난 유럽인이었다면 훨씬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라고 말 할 정도였다. 그의 성정체성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악평은 더욱 가혹해졌다.

그는 스로를 가두기 시작했고 지독하게 외로워졌다. 이 과정에서 서서히 자신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내 인생의 사랑(Love of my life)’를 헌사했던 평생의 연인도, 그의 정신적 지지자였던 가족도 그의 곁을 떠났다. 무엇보다 ‘사회부적응자들을 위한 음악’의 꿈을 함께 하던 멤버들과의 관계마저 멀어진다. 그리고 약해진 고리를 돈과 향략의 탐욕이 파고든다.

영화 ‘스카페이스’ 속 토니 역시 그의 꿈대로 부자가 되지만 그것은 파멸의 단초였다. 그는 무엇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돈이 신분이 되고 힘이 될 것이라는 맹목적 믿음으로 폭주했다. ‘꿈 속의 여인’이었던 아내는 환멸을 느끼고 그의 곁을 떠난다. 불법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돈은 이제 독이 되었다. 난민수용소시절부터 함께 해 온 친구마저 믿지 못하게 된 그는 사소한 오해로 친구를 사살하기에 이른다. 오만과 독선만이 남은 토니는 세상의 지옥에 스스로를 유폐한다. 돈으로 세상을 얻으려던 그는 돈으로 인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에서 지독한 나락으로 떨어진 프레디는 평생의 뮤즈를 다시 만나며 깨닫는다. “내가 얼마나 썩어 있는지 이제야 알았어. 지금 내 주위에는 남겨진 먹이만을 바라는 날파리들뿐이거든.”

그는 먼 길을 돌아서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는 이들 곁으로 돌아온다. 함께 꿈을 꾸던 동지들과 다시 함께 하며 그들은 진정한 전설이 되었다. 1985년 라이브 에이드 공연을 기획한 밥 겔도프는 ‘그들이 공연을 완전히 소유했다’고 평가했다. 이 날 프레디가 보여준 퍼포먼스는 대형 공연의 교과서가 되어 수많은 뮤지션들에게 하나의 교범이 되고 있다.



꿈은 함께 꾸는 것

한국미래기술이라는 회사의 양진호 회장에게서 영화 ‘스카페이스’ 속 토니 몬타나의 모습이 보인다. 그 역시 부자가 되고 싶었다. IT기반의 벤처회사로 수천억대 재산을 모으고 고급 외제차를 굴리며 좋은 집에서 떵떵거리며 사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만만치 않았고 그는 음란물 유통 등의 불법적인 사업에 손을 댄다. 그리고 그는 괴물이 되었다.

영화 속 토니 몬타나 역시 불법적인 사업으로 막대한 돈을 거머쥔다.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모든 이들이 그의 적이 되었다. 그는 모두를 의심하기 시작했고 정작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그의 곁을 떠났다.

양진호 회장 역시 자신의 회사를 일해 일하는 직원들을 종으로 여겼다. 자신이 벌어오는 돈으로 먹여 살리는 직원들에게 인격적인 대우는 불필요했다. 측근이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동영상 속 모습은 그의 정신 상태를 의심케 한다. 현재 8가지 정도의 혐의를 받고 있고 그 중에는 마약류 관리법 위반 혐의도 포함되어 있다. 불법 영상물 유통, 불법 도검류 소지 등의 혐의 외에 직원들에게 일본도로 닭을 죽이게 하거나 비타민을 적정량보다 10배 많이 먹여 설사를 유도하는 등의 ‘엽기적인 행각’은 공동체 전체를 경악케 하고 있다.

지난 평창동계올림픽에서 ‘영미’신드롬을 일으켰던 컬링 국가대표팀의 소식 역시 우리를 씁쓸하게 하고 있다. ‘팀 킴’ 선수들은 자신들을 지도해온 김경두 전 대한컬링경기연맹 부회장과 김민정 장반석 감독에게 폭언 등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다고 폭로했다. 선수들은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하고 있고, 상금을 제대로 배분받지 못한 채 폭언 등에 시달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좀 더 깊이 살펴야 하겠지만, 이들의 문제 역시 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평창올림픽 이전 우리나라는 컬링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국가대표 선발 방식 역시 소속팀이 곧 국가대표가 되는 독특한 방식이다. 연맹 간부의 영향력이 막강할 수밖에 없다. 당시에도 김 전 부회장의 딸인 김민정 감독이 여자대표팀 감독이었고 사위 역시 믹스컬링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고 있었다.

‘팀 킴’의 선수들이 파죽지세로 준결승에 진출한 이후 일본마저 격파하자 온 국민은 환호했다. 결승에서 패했지만 이들의 영화 같은 스토리는 온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상금 뿐만 아니라 기업의 후원금과 CF가 쏟아졌고 국민영웅의 자리에 올랐다. 유명 예능프로그램에까지 출연한 이들과 감독은 친자매처럼 따뜻하고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9개월여가 지난 지금, 문화체육관광부와 대한체육회는 합동 감사에 착수하기로 했다.

‘보헤미안 랩소디’의 엄청난 히트로 세계적인 스타가 된 퀸과 프레디 머큐리에게도 돈의 유혹이 접근했다. 영화에서 프레디의 매니저는 말한다.“지금 세계 음반 시장의 4%는 마이클 잭슨이 차지하고 있어. 잭슨 파이브가 아니라. 프레디 머큐리에게 밴드 퀸은 필요치 않아. 솔로 음반을 내라구.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을거야.”언론의 부당한 악평, 무대가 끝난 이후의 공허함, 성 정체성의 혼란으로 인한 고독에 시달리던 프레디는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다. 그러나 결국 그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연인과 가족, 그리고 ‘비적응자들을 위한 비적응자들의 음악’을 함께 꿈꾸었던 밴드의 멤버들에게 돌아오면서 그는 다시 행복해진다. 오랜 슬럼프에 시달리던 프레디와 퀸은 다시 함께 하면서 보란 듯이 최정상의 무대에 오르게 된다. 그들의 공연은 영국 BBC가 선정한 팝 역사상 최고의 퍼포먼스였다.

혼자만의 꿈은 탐욕일 뿐이다. 모두가 함께 행복해지는 꿈을 꿀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팀 킴’은 함께 있기에, 그들이 함께 꿈을 꾸고 있기에 아직 기회가 남아 있다. 그들의 오늘이 있기까지 함께 한 어른들이 탐욕이 아닌 희망으로 이들을 지켜주길 바란다. 청춘들의 꿈이 일부 어른의 욕심으로 또다시 무너지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팍팍한 세상을 살아갈 힘이 더욱 없어질 것 같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문화평론가
kjpark@j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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