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선의 남도인문학>몸으로 울어 쓰는 작품… 결코 작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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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인문학
이윤선의 남도인문학>몸으로 울어 쓰는 작품… 결코 작별하지 않았다
438. 김대성과 한강, 다랑쉬 오르는 언덕
  • 입력 : 2025. 03.13(목) 17:47
해금 연주자 박솔지가 김대성의 ‘다랑쉬’를 연주하고 있다. 해금연주 박솔지 영상캡쳐
다랑쉬 동굴 입구, 스산한 날씨였다. 2019년 8월 작곡가 김대성의 대표곡 ‘다랑쉬’가 연주되는 현장, 뒤덮인 칡넝쿨의 우듬지들이 해금 연주자 박솔지의 선율을 타고 울렁거렸다. 진한 슬픔의 곡조로 흐르는 선율임에랴 어찌 흔들리지 않을 잎이 있을 것이며 떨지 않을 가지가 있을 것인가. 낯익은 선율인 듯도 싶고 어쩌면 낯선 선율일지도 모를 이 가락을 듣자마자 나는 남도의 진계면 육자배기를 떠올렸다. 육자배기가 아니고서야 내면의 아픔을 이토록 헤집어놓을 수 있을까 싶었다. 이 곡이 발표된 것은 이보다 20여년 앞선 2002년이다. 해금 연구회가 위촉한 ‘해금과 25현 가야금을 위한 다랑쉬’였다. 당시 이 곡은 국악계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25현 가야금이 보편화되기 전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국악곡으로 제주 4·3을 직접 다뤘기 때문이다. 황호준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김대성의 다랑쉬는 국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기점이 되는 곡입니다.” 왜 이걸 작곡하게 됐느냐고 김대성에게 물었다. 엉뚱한 답이 돌아왔다. “미끄럼을 타고 언덕을 내려오는 꼬마가 보였어요. 자기가 죽은 내력을 보여준다고 했어요” 꿈속에 나타났단 말인가? “아니, 꿈이 아니라 실제였어요” 실제라니 환상을 보기라도 한 것인가 아니면 섬망(?妄) 증세라도 있는 것인가? 김대성이 이 곡을 쓰고 10여년이 지난 후, 모 저널의 4·3 관련 기사를 보고서야 이 아이의 이름이 이재수이며 사망 당시 열 살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는 언덕이 사실은 오름이었음도 이때야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증언을 듣고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현상을 무속적 영감이나 섬망 증세로 치부하기 마련이지만, 이 곡은 그것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비장미가 있다. 멜랑꼴리와는 결이 다른, 그렇다고 한국인의 한(恨)으로만 설명되지 않은 어떤 영감 말이다. 25현 가야금과 해금이 합주되는 곡에서는 경쾌하고 분주하게, 마치 아이가 다랑쉬 오름을 뛰어다니는 듯한 선율도 배치된다. 이후 수많은 편곡과 협주와 병주들이 일어난다. 노은아는 석사학위논문 ‘해금과 25현 가야금을 위한 다랑쉬 연구(서울대, 2004)’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계면조 음계를 바탕으로 하고, ‘라’를 중심으로 한 여러 선법을 사용해 음 진행의 단조로움을 피했다. ‘남도 계면조’와 ‘서도 토리’의 사용으로 민족적인 정서를 표현했으며, 중세교회 선법 중 하나인 ‘프리지안 선법’이 사용됐다. 진도의 ‘삼장개비’ 장단을 바탕으로, 헤미올라와 당김음이 다양한 형태로 발전돼 나타난다. 해금과 가야금이 각기 다른 리듬 진행으로 부딪히면서 긴장감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내가 이 곡을 듣자마자 남도의 육자배기라고 느꼈던 게 다 이유가 있었다. 살갗을 파고드는 울림이 어디 이 곡이나 음악에만 해당하겠는가. 한강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이 곡을 자연스럽게 떠올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표지와 한강 작가. 문학동네
김대성의 ‘다랑쉬’와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아마와 아미의 파랑새 작전

김대성의 다랑쉬를 틀어놓고 소설을 읽었다. 해금의 선율이 독서를 방해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독서삼매가 연주를 훼방하지도 않았다. 소설의 행간마다 혹은 대화의 결절마다 다랑쉬의 선율들이 베어 들어왔다고나 할까. 소나 염소가 먹은 것을 끄집어내 되새김질하듯이 말이다. 그래서다. 내 심중에 풀어놓은 소 한 마리는 다랑쉬 입구에서 풀을 뜯어 먹다가 오름에 올라 먼바다를 바라보기도 하고 열 살 아이처럼 미끄럼을 타고 내려오기도 했다. 또 한편의 염소 한 마리는 다랑쉬굴 입구에서 휑한 바람을 맞기도 하고 울울창창 숲길 너머 건천을 재빠르게 뛰어오르기도 했다. 김대성처럼 내게도 섬망 비슷한 영감이 밀어닥친 것일까. 소설의 화자 경하와 친구 인선이의 대화가 무성음처럼 공중에 흩어졌다가 오름을 치오르는 해금의 선율을 타고 흘렀다. 어떤 대화들은 계면조의 리듬들을 그저 그윽이 보듬어 안았다. 소설의 내용을 여기 풀어둘 필요는 없어 보인다. 지면 문제도 있지만 내게 그럴 만한 재주도 없다. 다만 두 친구의 계획, 한강이 다 말하지 않은 행간을 언급해 두고자 한다. 경하와 인선이가 함께 이루려고 했던 프로젝트의 이름이 ‘작별하지 않는다’이다. 사람 키 크기의 통나무에 먹을 입히고 즐비하게 세우려던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목공 일을 하던 친구 인선이가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하는 이면은 또 무엇일까. 인선이의 제주집에 있는 앵무새를 살리기 위해 제주도로 입도하는 깊디깊은 여행,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인 오름과 숲과 건천과 오두막과 인선이 엄마를 닮은 할머니, 모두 복선의 연속이다. 예컨대 인선이의 손가락 절단 사고는 4·3과 어머니와 삼촌의 어린 시절, 손가락 깨물어 막내에게 먹이던 핏물로 연결된다. 흰 눈과 검은 동굴, 앞도 뒤도 보이지 않는 백설의 도로와 제주비행장 땅속의 유골들이 대적 된다. 인선이가 기르던 앵무새의 이름에도 복선이 있다. 앵무새 ‘아마’는 이미 죽었고 ‘아미’ 또한 비로소 죽었으나 또 한편으로는 죽지 않았다. 인선이도 어쩌면 죽었지만 한 편으로는 죽지 않았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그녀가 아니라 서울의 병실에 누운 인선이’처럼 섬망과 환상 혹은 꿈을 오가며 시점이 변하고 시선이 변하고 과거와 현재의 시제가 변한다. 한강의 글쓰기는 가혹한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 고안한 매우 유용한 방식이다.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풍경과 모호한 대화들이 아니라면 어떻게 끔찍하고도 잔인한 그래서 살 떨리는 4·3의 내력을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남도인문학팁

작곡가 김대성과 소설가 한강에게

진달래 피고 지는 어느 날, 아니면 하얀 목련 피고 지는 어느 날이라도 좋다. 혹은 다랑쉬 오름이나 용눈이, 돝오름의 어디 귀퉁이도 좋고 창꼼바위 너머 자리돔 튀어 오르는 계절이어도 좋다. 해금과 가야금 혹은 첼로의 ‘다랑쉬’ 곡을 함께 연주하며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음영해 보자. 이야기와 해금의 협주라고나 할까. 김대성의 아이와 한강의 앵무새가 펼치는 공명이라고나 할까. 작곡가 김대성이 4·3과 관련하여 쓴 곡들이 많으니 이들을 배치하면 좋겠다. 해금과 가야금을 위한 다랑쉬를 모곡 삼은 첼로 변주, 모노 음악극, 양악 관현악 협주곡은 물론 해금, 가야금, 타악을 위한 비설(飛雪), 국악관현악을 위한 ‘진토굿’, 대금과 가야금을 위한 협주곡 ‘잃어버린 마을’ 등이 그것이다. 이외 유럽 등 외국에서 환호하는 김대성의 곡들이 셀 수 없이 많다. 한강이야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인류에 회자되는 수상소감,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다는 명언은 이 소설에도 그대로 현현됐다. 친구 인선이가 병원에서 회복되었는지 죽었는지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라도 결코 우리가 작별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앵무새의 죽음과 혹은 살아있음을 보고 생각한 것은 불교적인 이름이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관음과 파랑새 설화를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이것을 소설 밖 한강의 파랑새 프로젝트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파랑새는 죽음과 재생 혹은 죽임과 부활에 관한 지극한 인류 보편의 신화이다. 한강을 만나면 아미타와 관음에 스며든 파랑새를 직접 말하지 않고 앵무새를 말한 능청스러움에 관해 물어볼 요량이다. 내가 아는 한 김대성과 한강은 몸으로 울어 작품을 쓰는 이들이다. 김대성은 서사를 중히 보고 한강은 울림(共鳴)을 중히 본다. 그리운 이들이 비로소 살아 돌아와 지상의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이치, 이것이야말로 마땅히 음악과 문학예술이 담당해야 할 몫 아니겠나. 작별은 완성되거나 미루는 게 아니다. 김대성과 한강은 오로지 4·3과 아름답던 숲과 구멍 많은 바위와 무엇보다 그리운 이들과 작별하지 않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