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고향 땅 한번 밟아보면 소원이 없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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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죽기 전에 고향 땅 한번 밟아보면 소원이 없겠어요”
● 6·25기획 실향민에게 듣는다 <상>
황해도 금천 출신 오건웅(81)씨
1·4후퇴때 피난 와 광주에 정착
사투리 쓰다 “이북놈” 핍박·괄시
“전쟁 비극 절대 재발해선 안돼”
  • 입력 : 2024. 06.24(월) 18:12
  • 윤준명 기자 junmyung.yoon@jnilbo.com
황해도 금천군 출신 실향민 오건웅(81)씨. 윤준명 기자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25일은 대한민국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날이다. 그로부터 74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수십 년의 시간과 함께 그 상처는 희미해졌지만, 74년 매년 매시간이 고통의 순간이었던 사람들도 있다.

지구상에 남아있는 유일한 분단국가. 이 오명으로 인해 얻은 많은 희생 그리고 가족의 생사도 모른 채 분단선을 사이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아픔이 이제 더 이상 그들만의 아픔이어서는 안 된다.

이산가족의 사연이 우리 이웃의 이야기라는 것을 되새기고, 바로 알고 기억하는 기회를 갖기 위해 아직 아물지 않은 그들의 상흔을 되돌아본다. /편집자주



“이 나이에 더 바랄게 뭐가 있겠어요. 그저 죽기 전에 고향 땅 한번 밟아보면 소원이 없겠어요.”

6·25전쟁 74주년을 하루 앞둔 24일 1세대 실향민 오건웅(81)씨는 73년 전 떠나온 고향의 풍경을 추억하며 이같이 말했다.

2018년부터 6년간 이북도민회 광주연합회장을 맡기도 했던 오씨는 1943년 8월 황해도 금천군에서 태어나 국민학교에 다니던 1950년 6·25전쟁을 겪게 됐다.

오씨는 “하늘에 전투기가 날아다니고 사방에서 포탄 소리가 진동해 전쟁이 난 줄 알게됐다”며 “매일같이 군인들과 탱크가 지나다니고 길거리에 시체가 널브러져 있기도 해 어린 나이에 큰 충격과 공포를 느꼈다”고 회상했다.

그는 1951년 1·4후퇴 당시 가족들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을 내려와 광주에 정착했다.

오씨는 “당시 서울에 가면 어떻게든 살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가 먼저 남쪽으로 내려가셨다. 이후 국군이 38선 이북지역에서 철수한다는 소식에 어머니와 고모의 손을 잡고 무작정 남쪽으로 내려오게 됐다. 당시 한강을 건너다 전투기의 폭격을 겪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어 “아버지 소식을 알길이 없다가 양주 피난민 보호소에 아버지가 남긴 쪽지를 보고 가족이 다시 모일 수 있었다”며 “전쟁이 끝나고 남과 북이 분단되자 이남에는 연고가 전혀 없어 아버지가 동복 오씨의 본향인 전남 화순 동복면으로 내려가자고 제안했다. 이에 화순으로 내려가려다 인근 대도시인 광주에 정착해 평생을 살게 됐다”고 설명했다.

오씨는 전쟁이 끝나고 이남에 완전히 정착하게 되면서 황해도 사투리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지금은 광주·전남지역 방언이 심하지 않지만 과거에는 모두 방언을 사용해 우리 가족의 황해도 말씨가 특이해 보였을 것”이라며 “성장하며 ‘이북놈’이라며 핍박과 괄시를 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 밝혔다.

이어 “부모님이 돈 한푼 없이 광주로 내려와 고생도 많이 하셨다. 그래도 악착같이 사업을 일으키신 덕에 나도 대학에 들어가 장교로 군복무도 마치고 동생들도 모두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고 추억했다.

오씨는 어린시절에 고향을 떠난 자신보다 평생을 살아왔던 터전을 잃은 부모님의 그리움이 더 컸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부모님은 일평생 고향을 그리워하셨다. 친척들이 대부분 이북에 남아 있어 그들이 잘 지내고 있을까 걱정뿐이셨다”며 “특히 아버지는 실향민단체와 망향의 동산 설립추진위원회 등에서 적극적으로 활동을 하시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어 “부모님은 결국 고향의 흙 한번 만져보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다”며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친구들이 있는 망향의 동산에 묻어달라고 부탁하셨고, 양친 모두 그곳에서 실향민 동포들과 영면에 드셨다”고 덧붙였다.

오씨의 평생 소원은 고향 땅을 한 번이라도 밟는 것이다.

그는 “아직도 눈을 감으면 고향에서 친구들과 뛰어놀던 기억이 선하다. 어릴적 떠난 고향이 어떻게 바뀌었을지도 궁금하다”며 “지난 2018년 9월 평양공동선언 당시 실향민들은 통일과 친척들을 다시 볼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지만 대북관계 경색으로 물거품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이산가족 상봉도 짧은 만남에 긴 한숨을 남길뿐”이라며 “언젠가 남과 북 사이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저 죽기 전에 고향 땅 한번 밟아보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고 소망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오씨는 74년 전 6·25전쟁을 회상하며 앞으로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그날의 참혹함을 두눈으로 보고 분단의 고통을 지금껏 겪어보니 전쟁은 절대로 일어나면 안되겠다는 생각 뿐이다”며 “이념의 갈등 앞에서 사람들이 파리목숨처럼 죽어갔고 분단은 실향민들의 가슴을 멍들게 했다. 6·25의 비극이 절대로 반복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윤준명 기자 junmyung.yoon@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