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 농민항쟁 5)1927년 매화도 소작쟁의> 농민 조합원 불꽃 항쟁… '소작료 4할' 끝내 물거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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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 농민항쟁 5)1927년 매화도 소작쟁의> 농민 조합원 불꽃 항쟁… '소작료 4할' 끝내 물거품
탁현진·목포대 사학과 강사·도서문화연구원 연구원 5)1927년 매화도 소작쟁의||1928년 소작쟁의 실패로 끝나 ||농사경영자금 5전 대부 ‘위안’ ||섬내부 지주 등장도 쟁의 영향||서치규·서인섭 등 불법 저질러 ||식민권력 편승한 지주에 항거||주민들 독립운동가 발굴·추서
  • 입력 : 2022. 05.18(수) 17:52
  • 신안=홍일갑 기자

매화도 전경. 신안군 제공

신안 매화도 대동마을 앞 평원. 탁현진 제공

1933년 건립된 서인섭 부친 서치규영세불망비. 탁현진 제공

탁현진 목포대 사학과 강사·도서문화연구원연구원

1920년대 신안군은 항일농민운동의 중심지였다. 1923년 12월 시작된 암태도 소작쟁의는 1924년 8월 '소작료 인하'라는 성과를 얻어냈다. 이후 '소작료 인하' 요구는 지도, 도초도, 자은도, 매화도, 하의도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이 중 매화도는 현 신안군 압해읍 부속섬으로 '리' 단위의 작은 섬이다. 어떤 연유로 이 작은 섬 매화도에서 소작쟁의가 일어났던 것일까.

●일제의 식민정책·섬 인문환경 변화 주목해야

1920년대 현 신안군에서 일어난 소작쟁의는 당시 일제의 '산미증식계획'과 '저미가 정책'을 들 수 있다. 쌀가격이 낮아지자 지주들은 소작료를 올려 재산상 손해를 충당하려 했다. 이는 1920년대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최성환 교수(목포대 사학과·도서문화연구원)은 일제의 천일염 정책을 주목했다. 일제강점기 천일염전의 도입과 소금 관영화 정책으로 전통방식인 화염을 통해 소금을 생산했던 신안군의 섬 지역이 배제됐다. 섬사람들은 생활은 어려워졌고 지주들이 소작료를 인상하면서 소작쟁의가 발생했다. 단순한 일제의 식민지배 정책만이 아니라 섬 내부의 인문환경 변화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토지 매매 과정서 '공동체 붕괴' …대지주 서인섭 등장·목포 이주 후 유지로 활동

이천서씨가 매화도에 입도한 것은 18세기 초 서진방이 매화도 대동마을에 정착하면서다. 대동마을은 매화도에서 가장 큰 마을로 마을 앞에는 농사 지을 수 있는 넓은 평야가 자리잡고 있다. 서진방이 정착한 이래 이천서씨는 대동마을에서 '친족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성장했다. 작은 섬이다보니 혈연과 혼인으로 이어진 '마을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공동체'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서치규·서인섭 부자가 대지주로 성장하면서다. 서인섭은 1927년까지 매화도 토지를 적극 매입했다. 매입 대상은 매화도 주민뿐 아니라 친족들도 포함됐다. 서인섭은 토지 매매 과정에서 불법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소작인으로 전락한 이들에게 높은 소작료를 징수했다. 서인섭에 의한 지주 지배체제가 공고해지면서 공동체가 무너지고 말았다.

1920년대 초 목포로 이주한 서인섭은 유지로 활동했다. 대표적인 활동으로 목포부협의회와 목포농담회 활동을 들 수 있다. 목포부협의회는 지금의 목포시의회를 생각하면 된다. 목포농담회는 서남권 대지주들의 친목단체다. 서인섭은 목포 유력 인사, 다도해 지주, 식민권력과 인맥을 쌓아가면서 이후 매화도 소작쟁의를 제압할 수 있는 방안을 터득하게 된다.

●식민권력의 투입·매화도 주민 저항…간부진 체포·소작료 5할 합의

매화도 소작쟁의는 1927년 6월 매화도농민조합이 결성되면서 시작됐다. 서병대가 위원장을, 서병천(서찬술)은 자신의 집을 사무실로 제공했다. 이들은 서인섭과 당숙-당질 사이였다. 매화도농민조합은 지주들에게 '소작료 4할'을 통보했고 서인섭이 거부하자 그에 대한 소작료 불납운동을 단행했다. 매화도 소작쟁의는 서인섭에 의해 무너진 공동체가 다시 강화된 것이기도 했다.

서인섭은 식민권력을 동원해 소작쟁의를 탄압했다. 8월 말 서인섭은 법원의 허가를 얻어 가옥명도 가처분을 진행했다. 본인 소유의 집에 거주하고 있던 소작인들을 끌어내려 했다. 1차 집달리들이 동원됐을 때는 조합원과 농민 200여명이 저항했으나 2차 경찰이 투입되자 가처분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0월 추수와 소작료 감정을 앞두고 매화도농민조합은 4할, 서인섭은 5할을 주장하며 다시 대치했다. 11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쿠리야마[栗山兼吉] 검사가 직접 매화도에 입도해 '소작료 5할'을 강요했다. 농민조합은 풍해, 수해를 이유로 5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정을 말했으나 쿠리야마는 26명의 간부들을 구속하고 말았다. 목포에서 구속자 석방투쟁도 이어졌으나 실패로 끝났다. 일본인 인권변호사 후루야(古屋貞雄)의 지원도 있었으나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1928년 5월 서인섭과 농민조합은 소작료 5할에 합의하면서 '소작료 4할'을 외쳤던 매화도 소작쟁의를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농사 경영자금 5전을 대부받을 수 있게 된 것이 그나마 위안이라 할 수 있다. 9월28일 열린 재판에서 서병대, 서병천(서찬술), 박관섭이 징역 1년을 선고 받는 등 간부 26명에 실형 판결이 내려졌다.

소작쟁의 이후 매화도는 어떻게 됐을까. 1933년 건립된 '서치규영세불망비'를 보면 서치규를 찬양하는 문구 일색이다. 1927년 소작쟁의가 실패로 끝나면서 이후 서인섭에 의한 지주화가 확고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생존권 투쟁 넘어 식민지 체제 저항으로

매화도 소작쟁의는 조선인 지주가 대상이고 일제에 저항하는 구호가 없다는 점에서 생존권 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소작쟁의는 단순한 생존권 투쟁이 아니다. 식민지 체제에 편승해 성장한 지주에 대한 저항이었다. 식민권력과 유착한 지주에 대한 저항이었다. 서인섭이 '가옥명도 가처분'과 같은 식민지 법령과 집달리·경찰·검사와 같은 식민권력이 동원되었다는 것이 반증한다. 검사의 동원 이전의 소작쟁의에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례다. 매화도 소작쟁의는 단순한 생존권 투쟁이 아니라 거대한 식민권력과 싸운 항일농민운동으로 평가해야 한다.

최근 정부에서는 농민운동도 독립운동이라고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들에 대한 독립운동가 서훈도 지속되고 있다. 매화도에서는 서병천·조봉홍이 애족장, 서병언·임백춘·서병은·최권순·이만춘·한현채에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그럼에도 아직 추서 받지 못한 이들이 많다. 후손 발굴과 서훈이 계속되기를 기대한다.

신안=홍일갑 기자 ilgaphong@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