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52> 얽매이지 말고 너로 살아남아, 어떤 네가 되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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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노휘의 길위의 인생
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52> 얽매이지 말고 너로 살아남아, 어떤 네가 되든…
놀멍 쉬멍 걸으멍, 걸어서 제주 한 바퀴, 제주 올레길-모슬포올레에서 무릉올레까지 11코스(17.3km)||모슬포에서 순교자 '한양할망' 정난주를 만나다
  • 입력 : 2021. 06.03(목) 15:23
  • 편집에디터

모슬봉에서 바라본 산방산. 차노휘

1) 장소 그리고 '나'

사람은 자신이 사는 곳과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간다. 그 사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데 있어서 거주하고 있는 곳의 영향은 상당하다. 그래서 장소는 단순히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디에 사는 누구라고 자신을 소개하듯' 그 사람이 누구냐에 관한 것이 된다. 그만큼 거주지를 옮긴다는 것은 신중을 요한다. 환경의 변화에 따른 사회문화경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어떤 부류의 사람을 만나 어떤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암암리에 '그 사람을 변화시켰을 그 무엇'을 염두에 두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이다. 실제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바람이 너무 심해 '못 살 곳(못살포)'이라고 불렀던 모슬포에서 바람의 길을 따라 모슬봉에 올라 저 멀리 산방산과 형제섬을 바라봤을 때에도 분명 나를 좌우하고 있는 것은 '나'가 아니라 탁 트인 제주도의 남서부 해안과 짠 내 섞인 햇살이었다. 모슬봉에 위치한 중간 스탬프 박스에서 스탬프를 찍고 있을 때 자신을 모슬봉 산지기라고 소개하는 아저씨가 올레길 여정을 응원해주었을 때에는 광주에 있던 차노휘가 아니라 올레길을 걷고 있는 차노휘로서 거듭나고 있었다. 이렇듯 새로운 장소는 누군가에게 힘을 주지만 익숙한 장소에서 강제로 쫓겨나야 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정체성까지도 약탈당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도 있다. 조선 천주교사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여성, 제주 천주교회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인물인 '한양할망' 정난주(丁蘭珠, 1773~1838) 마리아처럼 말이다.

정난주 마리아묘. 차노휘

2) 한양할망 정난주

잠시 19세기 조선으로 돌아가 보자. 정조 이후 어린 나이로 임금이 된 순조는 정순 왕후(貞純王后)를 수렴청정시킨다. 세도정치를 시작하던 안동 김씨는 정순 왕후를 앞세워 남인(실학자, 서학에 관심)을 탄압한다. 정조의 후원을 받던 남인 세력 소탕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 당시 남인 명문가의 장녀이자 천주교도인 정난주는 시어머니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피신한다. 남편 황사영은 충북 제천 골짜기에 숨는다. 하지만 배론(舟論) 옹기마을 가톨릭 신앙공동체 토굴에 은거하고 있던 황사영은 곧 참수된다.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조선천주교회의 어려운 상황을 보고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의 흰 비단에 작성한 밀서(황사영 백서)가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정난주와 시어머니는 각각 제주도와 거제도의 관비가 된다. 두 살 된 아들 또한 유배형에 처해지지만 정난주가 사공과 나졸을 설득시켜 추자도 예초리 서남단 언덕에 내려놓기에 이른다.

모슬봉을 내려와서 굽이굽이 너른 밭길을 걷다 보면(사방 마늘 밭이다. 전국의 10%, 제주도의 60%는 대정마늘이 차지한다) 돌담으로 둘러싸인, 정난주 마리아의 묘가 있는 대정성지에 닿을 수 있다. 비록 노비 신분이었지만 풍부한 교양과 뛰어난 학식으로 되레 본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던, 어떤 혹독한 환경에도 자신을 잃지 않았던 '한양할망 정난주 마리아'와 만날 수가 있다.

무릉곶자왈 정개왓광장. 차노휘

3) 덩실덩실 춤추는 올레꾼

길 위에서는 100여 년 전, 순교했던 성자를 호출할 수도 있지만 '제멋대로 순례자'와도 조우할 수가 있다. '엉뚱녀'를 만난 것은 '정난주 마리아 묘'를 지나서였다. 그녀는 서른 걸음 즈음 앞서가고 있었는데 나는 마침 잘 됐다고 생각했다. 실은 걸을 때 그냥 걷는 것이 아니다. 내가 미처 외우지 못했거나 좀 더 공부해야 할 것들을 메모해서 그 메모지를 꺼내서 읽곤 한다. 앞서가는 그녀는 내가 리본을 찾을 에너지를 절약해 주는 이정표와 다름없었다. 한 이십 분이나 따라 걸어갔을까. 뭔가 이상했다. 오래전에는 저 형상물을 지나간 것 같은데…. 그녀는 큰 도로변으로만 걸어가고 있었다. 마을 도로변을 통과했을 때는 덩실덩실, 어깨춤을 또다시 추었다. 음악을 들으면서 걷고 있던 그녀는 신나는 음악이 나올 때마다 어깨와 고개를 마구 흔들어대곤 했다. 나는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야 내가 메모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흥에 취해 무작정 따라나섰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네이버 지도에서 '현재 위치'를 확인했다. 다행히 곶자왈로 향하는 곳이 인근에 있었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5분 이내로 올레길로 다시 들어설 수 있었다. 나는 앞서가는 그녀를 일별하고 오른쪽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검은 현무암 벽돌담에는 이제 막 정오를 넘어가는 햇살이 스며들어 있었고 내 앞으로는 그림자와 함께 오롯이 나만의 길이 펼쳐졌다. 그 길 위로 정난주가 아들에게 했다는 말이 쓰였다.

"나는 네가 황사영, 정난주의 아들이 아닌 경헌(경한) 너 자신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양반도 천출도 아닌 이 땅을 살아가는 보통의 양민이 되어, 때론 주리고 고통받겠으나 강인함으로 살아남아 끝끝내 또 다른 생명을 일구어가는 그러한 사내로 말이다.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말거라. 태생에도, 사상에도, 신앙에도…. 너 된 너로 살아남아, 어떤 네가 되든…(김소윤의 <난주>, 47쪽)."

길을 걷다가. 차노휘

대정읍 마늘밭. 차노휘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