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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 2천년 전의 타임캡슐, 광주 신창동 마한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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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 2천년 전의 타임캡슐, 광주 신창동 마한 유적

신창동 유적, 영산강유역 마한인 생활상 담겨
2012년까지 13차례 발굴 엄청난 유물 쏟아져
155㎝ 두께 벼껍질 압착층, 벼재배 논밭 확인
농기구·악기·수레 등 목기 유적 870여점 출토
학술적·문화적 가치 인정 사적 제375호 지정
‘역사문화권 특별법’에 신창동 유적 포함돼야

게재 2021-05-05 16:40:16
1997년 광주 광산구 신창동에서 출토된 현악기 유적
1997년 광주 광산구 신창동에서 출토된 현악기 유적
신창동 유적-칠이 담긴 토기
신창동 유적-칠이 담긴 토기
신창동 유적-벼껍질 압착층
신창동 유적-벼껍질 압착층
신창동 유적-수레바퀴통
신창동 유적-수레바퀴통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위치한 신창동 유적은 영산강 유역 초기 마한인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우리나라 최초의 저습지 유적이다. 이 유적은 1962년 서울대학교 고고학팀이 53기의 옹관(독무덤)을 발굴하면서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그 뒤 30년이 지난 1992년부터 2012년까지 13회에 걸친 발굴이 진행되었고, 발굴이 진행될 때마다 우리나라 최초·최고의 수식어가 붙는 엄청난 유물이 쏟아졌다. 첫 발굴이 이루어진 1992년, 신창동 유적은 학술적·문화적 가치가 인정되어 곧바로 사적 제375호로 지정되었다.

신창동 유적이 마한사의 복원에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는 최초·최고의 타이틀이 붙은 출토 유적·유물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2,000년 전의 타임캡슐, 신창동 유적·유물

신창동에서는 벼, 조, 밀, 들깨, 오이, 삼 등의 다양한 재배작물과 155㎝ 두께의 벼껍질 압착층, 벼를 재배한 밭과 논이 확인되었다. 특히, 밭벼 재배는 우리나라 최초로 확인된 것이다. 신창동 유적에서 확인된 벼껍질 압착층은 200㎡ 면적이며, 평균 두께를 50㎝로 가정하면 부피는 100㎥에 해당된다. 벼껍질(왕겨) 압착층은 벼의 무게로 환산하면 500여 톤으로 덤프트럭 50대에 실을 수 있는 엄청난 양이다. 중국 허무두(河姆渡) 유적에서도 70㎝의 벼껍질 압착층이 확인되었는데, 벼의 총량은 100톤 정도로 추정된다. 따라서 신창동 유적의 벼껍질 압착층은 현재까지 조사된 동북아시아 최대의 벼 생산 자료다. 벼껍질 압착층과 다양한 재배작물의 흔적은 영산강 유역의 마한인들의 주식이 쌀을 비롯한 오곡으로 오늘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신창동 저습지 유적에서 출토된 목기의 수량은 870여 점에 이른다. 이를 기종별로 분류하면 무기·농기류·공구·용기·제의구·방직구·악기·수레부속구·건축부재 및 기타 생활용품으로 다양하다. 이중 다수 농민들이 직접 사용한 대표적인 목기는 농기구다. 농사 도구는 기능에 따라 땅을 파는 굴지구, 수확하는 수확구, 식품으로 가공하는 가공구로 구분된다. 신창동 유적에서는 괭이와 따비 등 굴지구를 비롯하여 철낫을 장착하여 사용하는 수확구인 낫자루, 곡물의 껍질을 벗기거나 알곡을 부술 때 사용하는 가공구인 절구공이 등이 다수 출토되었다. 농공구의 자루와 수레바퀴, 불을 피웠던 발화대 등은 단단한 참나무가 사용되었고, 북은 울림이 좋은 버드나무를 이용하여 제작되었다. 이는 2,000년 전 신창동 사람들이 나무의 성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고, 용도에 맞는 나무를 선택하여 사용하였음을 보여준다. 2,000년 신창동 사람들의 나무에 대한 지식이 놀랍다.

칠(漆)은 인류가 발명한 최초의 천연 도장(塗裝, 바르거나 칠함) 재료로 옻나무의 몸통이나 줄기의 표층부에 상처를 내어 수액을 채취한 것이다. 칠 제품은 당시 하이테크 기술이었다. 신창동 유적에서는 내부에 칠이 담긴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옻칠 수액을 보관하거나 칠을 정제하는 과정에서 남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내부 바닥에 칠이 묻은 천 조각이 부착된 토기도 출토되었는데, 천 조각은 직사각형이었고 천 조각과 토기면 사이에 칠피막이 형성된 것으로 보아 토기 내면을 칠할 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신창동 유적에서는 완성된 칠을 바른 목기뿐만 아니라 칠기 제작과 관련된 칠 용기와 나무 주걱도 출토되었는데, 모두 우리나라 최초다. 이는 2,000년 전 신창동에 고도의 칠기 제작 기술을 가진 첨단 기술 집단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유적 주변의 영산강을 칠천(漆川)이라 칭하였던 조선 시대 기록에서도 뒷받침된다.

의복은 인간의 생활필수품 중 으뜸에 위치한다. 신석기 시대부터 의복을 만드는 옷감이 출현하지만, 신석기·청동기 시대의 직물 자료는 남아 있지 않고, 토기에 찍힌 자국이나 실을 뽑는데 사용된 가락바퀴만 남아 있다. 신창동 유적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두 점의 직물이 출토되었는데, 한 점은 삼으로 짠 마직물(麻織物)이었고 또 한 점은 비단이었다. 신창동 출토 천 조각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마한인들은 양잠을 알고 옷감을 만들었다"라는 기록이 사실이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신창동에서는 천 조각뿐 아니라 옷감을 짜기 위해 실을 뽑는 가락바퀴와 실을 감는 실감개, 그리고 베를 촘촘하게 짜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인 바디 등도 출토되었다. 바디는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유일한 것으로 선사·고대 시기의 베틀 구조를 밝혀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한편, 신창동에서는 삼베의 씨도 확인되었다.

신창동에서 출토된 최고의 유물 중 하나가 신창동 유물의 마스코트 역할을 하고 있는 현악기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삼한은) 해마다 5월이면 파종을 마치면 귀신에게 제사지낸다. 함께 모여서 노래부르고 춤을 추며……"라는 기록이나 "풍습이 노래 부르고 춤을 추는 것을 좋아한다. 이때 사용하는 슬(瑟)은 그 모양이 축(筑)과 비슷하며, 이것을 타면 곡조가 나온다"라는 기록이 있다. 『삼국지』에 서술된 '슬'로 추정되는 현악기는 절반 정도가 훼손된 모습으로 출토되었다. 현악기는 악기 줄인 현(絃)을 고정하는 두부(頭部)와 현을 걸어 소리를 내는 탄음부(彈音部), 현을 거는 구멍이 위치하는 현미부(絃尾部)로 구분된다. 두부에 2개의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이는 현을 고정하기 위한 양이두(羊耳頭)를 부착하기 위한 용도로 생각된다. 벚나무로 제작되었으며 10현으로 추정된다. 신창동 유적에서는 현악기와 함께 북과 찰음악기(擦音樂器)도 확인되었다. 이런 악기들은 소리를 내어 신을 부르는 도구였을 뿐 아니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출 때 흥을 돋우었을 것이다. 춤추고 노래 부르는 영산강 유역 마한인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발화구는 불을 피우는 도구로 발화막대, 발화막대집, 발화대로 구성된다. 신창동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발화구와 관솔이 출토되었다. 널빤지 형태의 발화대 한 면에 홈을 판 뒤, 이곳에 발화막대 한쪽 끝을 넣고 회전시켜 생기는 마찰열을 이용하여 불을 피운다. 발화대는 단단한 참나무를 사용하였고, 발화막대는 다소 무른 나무를 사용하였다. 발화구는 발화막대가 발화막대집에 넣어진 상태로 발견되었다. 함께 나온 관솔은 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의 조각으로 한쪽에는 불을 붙였던 흔적이 잘 남아 있다. 발화구의 출토는 초기 영산강 유역 마한인들이 불을 어떻게 관리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수레는 사람이 타거나 짐을 옮기는 운송 수단인데, 많은 부속구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신창동에서는 바퀴통, 바퀴살, 가로걸이대(車衡) 등의 수레바퀴 부속구가 함께 출토되었다. 수레는 신창동 지역의 유력자가 탄 마차로 추정된다. 신창동 유적에서 수레 부속구와 함께 낙랑계 토기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서북 지역의 낙랑과 영산강 유역이 서로 교류했음을 보여준다. 낙랑의 수레 부속구가 대부분 금속인 반면 신창동 유적의 부속구는 목제품이었다. 영산강 유역 신창동에서 수레바퀴 부속품이 출토됨으로써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마한은) 소와 말을 탈 줄 모르며 장례에 써 버린다"라는 기록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신을 만들 때 사용하였던 틀인 신발골이 출토되었는데, 세계 최초다. 전체적인 형태는 발의 모양과 흡사하며, 바닥은 평탄하게 깎았지만 앞과 뒤는 약간 들려 있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에 "삼한 사람들은 가죽신을 신고 다닌다"는 기록이 있다. 신창동 출토품은 발등에서 신코가 경사져 있어 동이전 기록처럼 가죽신을 만드는데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주광역시, 특별법에 포함되어야

최초의 저습지 유적인 신창동에서는 이미 살핀 것처럼 13번에 걸친 발굴을 통해 우리나라 최초·최고의 타이틀을 지닌 엄청난 유물이 출토되었다. 벼껍질층은 동북아 최대 규모였고, 칠 제품과 비단, 베틀, 현악기, 발화도구, 수레바퀴는 우리나라 최초였다. 그리고 신발골은 한국을 넘어 세계 최초였다. 이중 현악기와 베틀 도구인 바디, 수레바퀴는 신창동 출토 유물 빅 3로 불리며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신창동은 2,000년 전 영산강 유역 마한인들이 벼농사를 기반으로 하는 생산과 생활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핵심 유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한 문화권 복원을 위해 2019년 제정된 '역사문화권 정비 등에 관한 특별법'의 범주에 신창동 유적이 있는 광주광역시는 제외되어 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최근 광주광역시를 특별법에 포함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꼭 포함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