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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백제 무령왕릉보다 큰 고분 영산강 유역에 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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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백제 무령왕릉보다 큰 고분 영산강 유역에 산재

영산강 유역 마한 상징 유물·유적 가운데
옹관을 간직한 대형 고분군 가장 돋보여
길이 45m 덕산리 3호분, 천마총과 비슷
정촌고분, 금동신발 신은 여성 인골 출토
나주 복암리 3호분 아파트형 고분 ‘독특’

게재 2021-04-21 16:17:31
영암 내동리 쌍무덤
영암 내동리 쌍무덤
나주 반남 고분군
나주 반남 고분군
나주 복암리 정촌 고분
나주 복암리 정촌 고분
영암 내동리 쌍무덤 발굴 모습
영암 내동리 쌍무덤 발굴 모습

필자는 몇 년째 전국 역사 교사들의 영산강 유역 마한 연수 강사로 참여하고 있다. 연수에 참여하기 위해 온 서울·경상도 등 타 지역 역사 교사들은 거대한 봉분과 옹관을 보고 깜짝 놀란다. "이렇게 거대한 고분(옹관묘, 독널)이 많은데, 왜 아직 몰랐지"라는 반응이다. 외지의 역사 교사들이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처음 보는 것들이고, 그 크기와 숫자에 놀라는 것이다. 역사 교사들은 이런 큰 고분이 경주나 부여·공주에만 있는 줄 안다.

영산강 유역 마한을 상징하는 유물·유적은 국보 제295호 금동관을 비롯하여 금동신발과 대형 옹관, 엄청난 구슬, 구멍이 있는 유공토기 등 엄청나지만, 눈에 보이는 가장 큰 흔적은 누가 뭐래도 옹관을 품은 대형 고분이다.

무령왕릉보다 큰 덕산리 3호분

영산강 유역 나주 반남지역은 6세기 중엽까지 고대문화를 꽃피운 곳으로, 자미산 주변에 30기가 넘는 고분이 자리하고 있다. 대안리 일대 12기, 신촌리 일대 9기, 덕산리 일대 14기가 그것이다. 이들 고분군은 사적 제513호로 지정되었는데, 고분의 숫자도 엄청나지만 백제 왕들의 무덤을 능가하는 규모와 금동관, 금동신발, 환두대도 등 껴묻거리의 질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한다.

반남고분 중 가장 큰 고분은 덕산리 3호분이다. 덕산리 3호분은 길이(지름) 45m, 높이 8m의 크기인데, 이는 높이 12.7m, 지름 50m인 경주의 천마총과 비슷하지만, 지름 20m, 높이 7.7m인 백제 무령왕릉보다는 훨씬 크다. 이 정도 규모의 무덤이라면 봉토를 쌓는데 5천 명 이상의 노동력이 동원되어야 한다. 이러한 봉분의 크기는 쌓는 방식의 차이 때문이지만, 외형상의 크기로만 보면 마한인들이 남긴 반남고분의 규모가 대단함을 알 수 있다.

덕산리 3호분을 비롯한 반남 일대에 남은 고분의 매장 방법도 매우 특이하다. 반남의 고분(독무덤)은 고구려의 돌무지무덤, 백제의 돌방무덤, 신라의 돌무지덧널무덤 등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하나의 무덤 안에 수 개 혹은 수십 개 이상의 시신을 담은 옹관이 합장되어 있거나, 무덤 주위에 도랑을 판 모습이 그 차이점이다. 덕산리 3호분에서는 3기의 옹관이 묻혀 있고, 봉토 속에서 쇠화살촉(鐵鏃), 쇠손칼, 쇠못(鐵釘) 등의 철제 유물과 은제옥(銀製玉)과 같은 장신구 외에 금동장식금구편(金銅裝飾金具片)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은 국보 제295호인 인근의 신촌리 9호분에 비하면 적은데, 이는 도굴을 당했기 때문이다. 덕산리 3호분이 어떻게 도굴되었는지는 1939년 조사를 맡았던 일본인 아리미쓰 교이치의 '벌집 같은 구덩이들만 남아 있었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지금 다시 복원된 덕산리 3호분은 국립나주박물관 가장 가까이에 있어, 반남고분의 수문장 역할을 하고 있다.

영암 최대 고분, 내동리 쌍고분

영암에는 40개 군 150여 기에 달하는 독무덤이 분포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도 시종면을 중심으로 25개 군 100여 기가 집중되어 있는데 특히 내동리·신연리·옥야리에 밀집되어 있다. 그 중 내동리 쌍무덤이 가장 크고 유명하다.

이 고분군은 원래 4기였으나 4호분은 주민들이 가족묘를 조성하여 훼손되고 3기만 남아 있다. 1호분은 지름 53m, 높이 4~7m의 타원형으로 영산강 유역을 대표하는 독무덤 중 하나다. 북쪽에 약간 낮은 평탄부가 있어 장고분으로 보기도 한다. 2호분은 원형으로, 1·2호분이 마치 붙어있는 쌍둥이 모습이어서 쌍무덤이라 불린다. 3호분은 1호분 가까이 동쪽으로 있는데 1·2호분에 비해 크기가 작다.

쌍무덤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2018년 4월부터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내동리 쌍무덤은 6세기 전후에 축조한 방대형 고분이며, 고분 안에 석실 1기, 석곽 3기, 옹관 2기 등 총 6기의 무덤이 확인됐다. 석곽에서 대도(大刀)를 비롯해 자라병, 유공광구소호, 단경호 등 다양한 토기와 곡옥(굽은 옥), 대롱옥 등 수백 점의 유리구슬이 쏟아져 나왔다.

특히 유리구슬과 영락(瓔珞, 얇은 금속판 장식) 등 금동관 편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반남면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에 장식된 유리구슬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당시 내동리 쌍무덤에 안치된 피장자의 지위나 권위가 나주 신촌리 고분의 피장자와 더불어 이 지역 일대 최고의 귄력자였음을 말해준다.

이외에도 쌍무덤 주위 도랑에서 동물형 형상 식륜(植輪, 흙으로 만든 장식품)도 출토되어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했음도 알 수 있다. 식륜은 일본 무덤에서 주로 확인되는 유물로 무덤 도랑이나 봉분 주변에 둘러서 세워두는 닭이나 말 등 동물이나 인물 등을 흙으로 만든 토제품이나 토기로 제의와 관련된 유물이다.

'아파트형 고분'으로 불린, 나주 복암리 3호분

사적 제404호로 지정된 나주 복암리 고분군은 회진 마을 앞 영산강변에 조성된 고분이다. 복암리에는 7기의 고분이 있었는데, 경지정리를 하면서 3기는 없어지고 현재는 200m 반경 안에 4기만이 남아 있다. 이 중 4세기에 걸친 무덤의 변천을 잘 보여주는 것이 3호분이다.

3호분에서는 22기의 독무덤(甕棺)과 구덩식돌방무덤·돌덧널무덤·굴식돌방무덤 등 영산강 유역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묘제가 망라된 41기의 매장시설(무덤)이 확인되었다. 분구는 방대형으로 동서 지름이 38m, 남북 지름이 42m이며 높이는 6.0m로 영산강 유역 고분 중 규모가 최대급이다. 이들 무덤은 순서에 따라 차곡차곡 쌓여있는 듯한 모양새를 보여주고 있어 '아파트형 고분'이라는 별명도 얻게 되었다.

복암리 3호분은 전용 옹관 중에서 이른 시기(3세기)에 해당하는 것이 있고, 굴식돌방 중에는 7세기 전반까지 내려오는 것이 있다. 전체적으로 400여 년간 사용된 고분으로, 중심 조성 연대는 5세기 후반∼7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이 고분은 당시 토착 마한세력에 의해 조성된 집단 무덤인데, 특히 1996년에 조사된 한 석실에서는 4기의 옹관이 출토됨으로써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엽에 걸치는 영산강 유역 초기 석실분의 피장자는 옹관을 썼던 기존의 세력자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는 영산강 유역의 초기 석실분과는 전혀 다른 백제계통의 후기석실분이 들어오고 은제관식이 출토되기 시작하는 6세기 중엽까지 기존의 마한 집단이 독립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40대 마한 여자 수장을 품은 정촌고분

2013년부터 2016년까지 4년에 걸쳐 발굴된 정촌고분은 발굴 당시부터 큰 관심을 끌었다. 주인공의 인골뿐만 아니라 주인공이 썼던 금동관과 용머리 장식을 한 멋진 금동신발이 출토되었고 '빈장(殯葬)'이라는 영산강 유역 수장층의 장례문화까지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정촌고분은 한 변의 길이가 30m, 높이가 9m 크기의 대형 고분인데, 무덤 안에는 돌방 3기, 돌널(石槨) 4기, 독널 6기 등 총 14기가 매장되어 있었다. 3기의 돌방 중 1호 돌방은 너비 355㎝, 길이 483㎝, 높이 296㎝인데, 이는 현재까지 영산강 유역권에서 확인된 굴식돌방무덤 가운데 최대규모이다. 이 정촌고분의 굴식돌방무덤(1호 석실)에는 시차를 두고 3기의 목관이 안치되었는데, 1차와 3차 목관에서 무덤의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2개의 인골과 함께 금동관 파편과 용머리가 장식된 금동신발, 수많은 옥 제품 등이 출토되었다.

인골 중 부스러진 머리뼈와 정강이뼈가 확인된 1개체는 5세기 3/4분기(450~475년)에 1차로 안치한 목관의 주인공이다. 머리뼈만 1개체 수습된 3차로 안치한 인골의 주인공은 5세기 4/4~6세기 1/4분기(475~525)에 안장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과학적인 분석과 법의학적인 해석을 통해 확인된 인골 2구는 150㎝ 내외의 40대 여성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5세기 말 6세기 초엽(475~525년) 영산강 유역 다시벌(평야)을 다스리던 마한 출신 토착 지도자가 금동관과 금동신발을 착용한 40대 여성이었음을 알려준다.

정촌고분 출토 금동신발에는 '검정뺨금파리(Chrysomyia megacephala)'로 추정되는 파리 번데기가 발견되었다. 통상 알에서 번데기가 되기까지는 6.5일 정도 걸리는 것을 고려한다면, 정촌고분 1호 석실 주인공은 최소 7일 이상 노출된 후 무덤에 안치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즉 이는 당시 영산강 유역 수장층들의 장례는 시신을 매장 전에 일정 기간 빈소에 안치하였다가 장례를 치르는 '복장(複葬)' 즉 '빈장(殯葬)'이 행해졌음도 알게 해주었다. 파리 번데기가 오늘 마한 수장급들의 장례문화까지 알려주니, 참 대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