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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비단옷에 가죽신, 마차를 타는 멋쟁이 마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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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비단옷에 가죽신, 마차를 타는 멋쟁이 마한인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마한사람 생활상 기록
광주, 보성, 무안 등 여러 지역에서 유물 출토
신창동 세계 최고의 신발골, 최초 천조각 발굴
조리도구, 그릇, 마차 바퀴, 걸이대 등도 나와

게재 2021-04-14 15:58:47
마한인의 부엌 모습(국립나주박물관 제공)
마한인의 부엌 모습(국립나주박물관 제공)
마한인이 사용한 고깔과 빗
마한인이 사용한 고깔과 빗
마한인이 사용한 농기구
마한인이 사용한 농기구
광주 신창동 출토 마한인 고깔
광주 신창동 출토 마한인 고깔

영산강 유역 마한을 연재하면서 2,000여 년도 훨씬 전인 광주·전남 지역에 둥지를 틀었던 마한인들의 삶이 궁금했다. 마한인들은 무엇을 재배하여 먹었고, 어떤 농사 도구를 사용했으며,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신발을 신었을까?

오곡을 심고 누에를 치다

마한 사람들은 곡식을 심어 먹었고, 누에를 쳐 옷을 해 입었다. 이는 『삼국지』 위서동이전의 "마한 사람들은 토착생활을 하며 곡식을 심고 누에와 뽕나무를 알아 면포를 만들었다"라는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광주 신창동 등 여러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 확인된다.

보성 조성리, 무안 양장리 유적에서는 논과 함께 물이 흐르는 통로인 수로, 저수시설, 인공 제방 등이 확인되고 있어 당시 농사를 짓기 위해 물을 잘 관리하고 있었음도 알 수 있다. 신창동 유적에서는 벼를 재배한 논의 토층(土層) 뿐만 아니라 벼를 재배한 밭이 최초로 확인되기도 했다. 이러한 농업 기술을 통해 벼와 보리, 밀, 조 등 오곡을 재배하였다.

오곡 외에도 가래, 복숭아, 살구, 오이 등 다양한 과일 및 밭작물 자료들이 마한의 여러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들 유물들은 마한인들이 먹었던 먹거리가 오늘 우리가 먹는 먹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게 해준다.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오이씨는 씨앗류 가운데 가장 많이 출토되고 있어, 신창동 유적을 남긴 마한인들의 주요 식용 채소가 오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논벼와 밭벼를 재배한 신창동 유적의 가장 큰 특징은 두께 155센티에 달하는 벼 껍질(왕겨) 압착층의 존재다. 확인된 벼 껍질 압착층은 200㎡으로 평균 두께를 50센티로 가정하면, 부피는 100㎥에 해당하는 것으로 벼의 총량은 500톤 정도로 산출된다. 신창동 저습지 출토 탄화미와 유기물층에 포함된 벼잎 및 줄기로 DNA 분석을 실시한 결과 둥글고 짧은 쌀로 중국 중북부와 우리나라, 일본이 주산지인 자포니카(japonica)로 확인되었다.

농경이 시작된 신석기 시대 이래로 다양한 종류의 농사 도구가 출현하였다. 농사 도구는 기능에 따라 크게 땅을 파는 농기구, 농경물을 수확하는 농기구, 농산물을 가공하는 농기구로 구분된다. 땅을 파는 농기구로는 괭이·고무래· 따비 등이, 수확하는 농기구로는 돌칼과 낫 등이, 그리고 가공하는 농기구로는 갈돌과 갈판·돌확과 공이·절구공 등이 있다.

이중 따비는 경사가 심한 소규모의 밭이나 돌과 나무뿌리 때문에 쟁기를 사용할 수 없는 곳에서 땅을 일구는데 사용하는 도구이다. 따비는 날의 수에 따라 외날따비와 쌍날따비로 구분되는데, 신창동 유적에서 발굴된 쌍날따비는 농경문청동기에 묘사된 것과 같은 형태 실물로, 우리나라 최초로 출토되어 큰 관심을 끌었다.

가죽신을 신고 비단옷을 입은 멋쟁이

영산강 유역 마한인들은 나름 멋쟁이였다. 마한인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신발을 신었는지는, 마한 사람들은 "누에치기와 뽕나무를 가꿀 줄 알았고 면포를 만들었다.……머리를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날카로운 병기와 같았다. (삼)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발에는 가죽신을 신고 다녔다"라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영산강 유역인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는 비단과 삼베로 확인된 우리나라 최초의 천 조각이 출토되어 위 기록을 확인시켜 주었다. 더욱이 천과 실을 만들 때 사용된 직물 생산 도구인 바디를 비롯하여 실감개, 가락바퀴와 뼈 바늘도 확인되어 신창동에서 직접 천을 생산하였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신창동에서 출토된 바디는 선사·고대 시대의 것 중 유일한 것으로 베틀의 구조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다.

신창동에서는 신을 만들 때 사용된 틀인 세계 최고의 신발골도 출토되었다. 발등에서 신코가 경사져 있어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에서와 같이 가죽신을 만드는데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창동의 마한인들은 두건도 즐겨 착용했다. 그리고 비오는 날 머리에 쓰는 고깔 모양으로 생긴 나무제품의 비 가리개도 확인되었다. 이와 함께 나무로 만든 빗도 발굴되어 영산강 유역 마한 사람들의 상투와 두발 관리가 철저했음을 보여주었다.

베틀 부속품인 바디와 비단 그리고 신발골과 빗의 출토는 영산강 유역 마한인들이 비단옷을 입었으며, 가죽신을 신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긴 멋쟁이였음을 알려 준다.

마한인들의 조리도구와 식기

영산강 유역 마한인들의 조리도구와 음식을 담았던 그릇도 궁금하다. 청동기 시대까지는 곡물을 토기에 넣어 삶아 죽과 비슷하게 만들어 먹었다. 이후 시루·솥·국자와 같은 취사도구의 개량과 보급이 이루어지고, 부뚜막과 같은 취사 설비가 만들어지면서 조리법에 큰 변화가 생겼다.

끓이거나 삶는 조리법에는 옹형토기(甕形土器)가 사용되었다. 조리에 사용된 토기는 조리 과정에서 남겨진 내부의 음식물 찌꺼기, 끓은 흔적과 외면에 남겨진 그을음 등을 통해 확인된다. 그리고 토기 외면에 그을음이 묻은 부위를 통해 화덕을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부뚜막이 놓였던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화덕을 이용한 토기는 토기 외면 전체에 그을음이 묻어 있으며, 부뚜막에 놓였던 토기는 토기의 중간 아랫부분에만 그을음이 묻게 된다.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옹형토기는 외면 전체에 그을음이 묻어 있었다.

국자는 국이나 죽과 같은 음식을 조리기에서 식기로 옮기는데 사용되는 취사도구이다.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나무 국자는 용량이 200㎖, 450㎖가량으로 현재 가정에서 사용하는 일반적인 국자(180~200㎖)와 비슷하거나 두 배 이상 큰 용량이었다. 또한 흙으로 만든 국자는 최대 50㎖ 가량으로 작으며, 작은 것은 현재의 숟가락과 비숫한 용량의 것도 있었다. 이 중 아주 작은 토제품은 의례용일 것으로 추정된다.

마차를 탄 마한인

짐을 옮기거나 사람이 타는 운송 수단인 수레는 많은 부속구로 만들어진다.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는 기원전 1세기경에 목재로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수레바퀴 유물이 출토된다. 이 유물은 바퀴살 22개가 박힐 수 있도록 홈이 파인 수레바퀴 통으로 발굴 당시 5개의 바퀴살이 남아 있었다. 바퀴살과 더불어 말고삐를 고정시키는 가로걸이대도 발굴되었다. 이 가로걸이대는 마차에만 장착되는 장착물이며, 말 한 필이 끄는 수레에 사용된다.

수레바퀴살과 수레바퀴통 그리고 가로걸이대 등 수레바퀴 유물이 출토됨으로써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마한인은) 소와 말을 탈 줄 모르고 모두 장례에 써 버린다"는 기록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고구려의 경우 고분벽화에 많은 수레가 등장한다. 현재 알려진 95기의 고분 벽화 중 18개 고분에서 40대의 수레와 4개의 수레바퀴가 확인되고 있다. 이처럼 많은 수레가 등장하는 것은 수레가 기마민족인 고구려인에 의해 일상생활에 폭넓게 활용되고 있었던 사회였음을 말해준다.

이에 반해 마한에서 수레는 일상생활에까지 폭넓게 사용되지는 않은 것 같다. 신창동에서 출토된 수레는 짐을 실어 나르는 수레가 아닌 집단의 유력자가 타고 다닌 마차였다.

중국인이 남긴 『삼국지』 위서동이전은 당시 한반도 남부 지역에 위치한 마한의 문화 수준을 낮게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수레 제작은 바퀴살과 바퀴테, 수레 축 등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한다. 신창동에서 출토된 바퀴살을 통해 복원된 바퀴의 지름은 120~160센티였다. 이 정도 크기의 바퀴가 지날 수 있는 길도 닦이거나 다져졌을 것이다. 그리고 수레바퀴살에는 당시 귀중품에게만 사용하던 칠도 칠해져 있었다.

칠을 해 반짝이는 수레를 탄 마한인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비단옷을 입고 가죽신을 신은 마한인이 수레를 타고 지나가고, 어디선가 현악기 소리가 들리는 2,000년 전의 영산강 유역의 마한 마을의 품격 있는 풍경이 그려진다. 오늘 광주 문화의 출발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