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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영산강 유역 마한 문화의 상징, 대형 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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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영산강 유역 마한 문화의 상징, 대형 옹관

대형옹관, 6C 중엽 영산강유역 마한문화 대표 상징
백제 무덤 양식인 굴식돌방무덤과는 전혀 다른 모습
영산강 중류 나주 오량동서 옹관 제조 가마터 발견
3C~6C까지 시기에 따라 형태·크기에서 다양한 변화

게재 2021-03-24 16:19:07
국립나주박물관에 전시중인 대형 옹관
국립나주박물관에 전시중인 대형 옹관
나주 오량동 대형 옹관 제조 가마터
나주 오량동 대형 옹관 제조 가마터
영산강 유역 마한문화의 상징인 대형 옹관 발굴 모습.
영산강 유역 마한문화의 상징인 대형 옹관 발굴 모습.

국립나주박물관에는 '금동관'도 있고, '옹관'도 있다

6세기 중엽 영산강 유역의 마한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은 대형 옹관(甕棺, 독널)이다.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 교수는 나주 반남을 지나면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다음의 글을 남긴다. "반남면 신촌리, 대안리, 덕산리에는 7∼8개씩의 큰 무덤들이 떼를 지어 있는데 그 무덤에서는 커다란 독 두세 개를 포개서 만든 옹관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런 옹관묘(독널무덤)는 삼국시대에 오직 영산강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무덤 형식인 것입니다. 지금 광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무지하게 큰 옹관은 신촌리에서 수습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광주박물관장을 지낸 이을호 관장은 남도에 답사온 학생들을 보면 '여기는 금관은 없어도 옹관은 있어요 잉'이라며 뼈있는 농담으로 시작하곤 했습니다."

전 국립광주박물관장을 지낸 이을호 박사는 광주박물관에 '금관은 없어도 옹관은 있다'라고

'옹관'을 은근히 자랑했다고 한다. 금관과 옹관에 같은 '관'자가 들어가니 옹관은 금관과 동격일 수 있다는 유머인데, 그 유머 속에 옹관에 대한 자긍심이 묻어난다.

오늘 국립나주박물관은 옹관 박물관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대형 옹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반남면 신촌리 9호분 을관에서 출토된 국보 제295호로 지정된 금동관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옹관만 있는 것이 아닌 금동관도 함께 있으니, 이젠 '금동관도 있고 옹관도 있다'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옹관은 국립나주박물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삼국시대 전시실에도 거대한 독 10여 기가 거꾸로 뒤집어져 놓여 있다. 작은 것은 70㎝, 큰 것은 170㎝나 되는 대형이다. 이 옹관에 대한 설명 패널에는 "4~6세기 영산강 유역에서 유행하였던 무덤으로 그 지역의 권력자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170㎝나 되는 대형 옹관, 이는 영산강 유역에서만, 그것도 4~6세기에만 존재했던 독특한 장례 문화였다. 이는 당시 백제의 무덤 양식인 굴식돌방무덤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영산강 유역 마지막 마한 공동체가 6세기 중엽까지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징표가 아닐 수 없다.

영산강 유역 분구묘와 대형 옹관의 특징

옹관(독널)이란 항아리나 독 2개를 맞붙여 만든 관을 말한다. 인류가 토기를 만들기 시작한 이래 많은 나라에서는 항아리나 독으로 관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 시대부터 주로 어린아이의 매장시설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영산강 유역에서는 3세기부터 커다란 옹관을 매장시설로 이용하기 시작하여 성인의 관으로 사용하기 위한 대형 옹관으로 발전했다. 특히, 5~6세기가 되면 영산강 중·하류 지역을 중심으로 다른 지역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U'자 형의 대형 옹관이 제작된다.

영산강 유역의 대형 옹관을 포함한 장례 문화의 독자성, 즉 다른 지역과의 차별성은 다음의 것 등이 거론된다.

영산강 유역에서 옹관 무덤을 만들 때는 지상에 흙을 언덕처럼 쌓은 다음 언덕의 일부분을 다시 파 그 안에 옹관을 매장하였다. 무덤을 추가할 때는 언덕의 바로 옆쪽이나 위쪽에 흙을 다시 쌓아 같은 절차를 반복하였다. 이처럼 시신을 매장할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언덕처럼 흙을 쌓아 올린 것을 '분구(墳丘)'라 하고, 분구에 하나 이상의 매장시설을 축조한 무덤을 분구묘라고 한다. 무덤을 쓰기 전에 분구를 미리 조성했던 풍습은 3~4세기 서울과 충청도 지역에서도 보이지만, 영산강 유역만은 6세기까지 지속된다. 옹관을 매장한 분구묘가 6세기까지 축조되었음이 우선 다른 지역과의 차별성이다.

분구묘는 나무널을 지하에 매장하는 봉분과는 달리 지상 분구에 대형 옹관을 매장하고 여러 사람이 시간 순서에 따라 묻히는 다장(多葬)이다. 처음에는 수평으로 확장하다가 5세기부터는 수직으로 확장되면서 네모반듯한 모양인 방형(方形)으로 고정된다. 수평으로 확장된 초기 무덤이 위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인 반면, 후기 무덤이 오늘 보는 것처럼 방형의 웅장한 무덤이 된 이유다.

차이점은 지상 매장과 다장만이 아니다. 크기도 엄청나다. 청동기시대나 삼국시대의 옹관은 1미터를 넘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그런데 영산강 유역의 일부 옹관은 그 크기가 2미터나 되고, 옹관 두 개를 연결할 경우 3미터가 넘는 경우도 확인되고 있다. 무게 또한 300㎏이 넘는다. 옹관과 마주치는 순간 '와'라는 감탄사가 터져 나오는 이유다.

무덤의 주인공도 다른 지역과의 차이점이다. 다른 지역의 옹관이 권력자를 위한 묘제가 아닌 반면에 영산강 유역의 옹관은 최고 권력자도 사용했다는 점이다. 나주 신촌리 9호분 을관(乙棺)에서는 국보 제 295호로 지정된 금동관과 금동신발, 금동 귀고리, 환두대도, 구슬 등 왕급 무덤에서 부장될 수 있는 최고의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고고학계에서는 이 을관의 주인공을 영산강 유역 마한 왕국의 최고 권력자로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영산강 유역에 축조된 옹관 무덤은 다른 지역, 특히 돌방을 만들어 시신을 매장했던 백제와 전혀 다를 뿐만 아니라, 옹관을 썼던 다른 지역과도 큰 차이를 보인다.

왜 커다란 옹관을 만들었을까?

사람들이 처음 옹관을 관으로 사용했던 것은 사망률이 높던 시절 어린아이가 죽었을 때 사용하던 항아리나 독을 이용하여 간편하게 매장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혹은 사람의 시신에서 뼈만 추려 매장하는 세골장(洗骨葬)을 위한 뼈 항아리로 사용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영산강 유역 옹관의 경우 처음에는 생활용품으로 만든 독을 관으로 사용하였지만, 점차 관으로만 사용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한 전용 옹관으로 발전하게 된다. 옹관만을 만들기 위한 대형 가마가 영산강 중류지역에 위치한 나주 오량동 가마터(사적 제459호)에서 만들었음도 확인되고 있다.

왜 대형 옹관이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시체를 잘 보존하기 위해 썩지 않는 관을 만들려 했다는 견해도 있고, 재생과 부활을 기원하기 위해 알과 같은 형태로 만들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또한 옹관의 목 주변을 둘러 장식한 톱니바퀴 무늬는 태양을 상징하는 것으로 재생과 부활을 의미한다고 보기도 한다. 즉 정확한 발전 원인을 확신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이 지역의 전통적인 무덤 양식 위에 영산강 지역 사람들의 생사관(生死觀)이 작용하여 대형의 옹관이라는 독특한 묘제로 발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옹관의 발전과 소멸

영산강 유역의 대형 옹관은 시기에 따라 형태와 크기에서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대체로 등장기(3세기), 발전기(4세기), 성행기(5세기), 쇠퇴기(6세기)의 4단계로 나뉜다.

등장기인 3세기경의 옹관은 이전 시기에 비해 크기가 매우 커지고 옹관의 목이 길게 뻗어 올라가 아가리가 바깥쪽으로 꺾이는 항아리 모양이었다. 나주 금곡리 용호고분군과 함평 예덕리 만가촌 고분에서 출토된 옹관이 이 시기의 것들이다.

4세기 발전기에 이르면 옹관은 시신을 안치하기에 보다 적합한 형태로 바뀐다. 이음식 옹관 중 작은 옹관의 어깨 부분이 먼저 짧고 직선적으로 바뀌게 되고, 두 항아리의 결합은 더욱 견고해진다. 나주 복암리 3호분 속 10호 옹관이나 영암 월송리 송산고분 출토 옹관이 좋은 예다.

성행기인 5세기대의 옹관은 어깨 부분의 굴곡이 약해지고, 아가리가 직선화되어 'U'자 모양에 가까워진다. 옹관은 더욱 높아지고 커져 3미터에 가까운 대형 옹관이 만들어진다. 나주 신촌리 고분, 영암 태간리 일곱뫼 고분, 영암 내동리 고분군 출토 옹관이 이때 만들어졌다.

쇠퇴기인 6세기 중엽이 되면 영산강 유역은 백제의 지방 지배체제로 편입된다. 이 과정에서 옹관 무덤은 백제실 무덤 양식인 굴식돌방무덤으로 바뀌게 되고, 옹관의 형태도 전형적인 'U'자 형에서 변형된 형태들이 등장하고 크기도 작아진다. 작은 쪽의 항아리는 더 작아지면서 단순히 막는 기능만을 수행하게 된다. 무안 구산리, 나주 복암리 출토 옹관은 쇠퇴기 단계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대형 옹관을 사용하여 시신을 매장하는 독특한 장례 문화가 크게 발전하기까지는 한 가지 요인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옹관 고분의 발전과 소멸이 영산강 유역 마한 세력의 흥망성쇠를 보여주고 있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