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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마한, 백제 병합 시기 - 근초고왕 4C 병합설의 근거와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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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마한, 백제 병합 시기 - 근초고왕 4C 병합설의 근거와 문제점

삼국사기 ‘백제본기’ 마한 병합 기록 사실과 달라
신라본기·고구려본기에 기원후 9년 이후에도 등장
중국 사서에 3C 후반까지 마한이 사신 파견 기록
이병도 주장 日 신공기 49년조 기록, 다양한 해석
영산강유역 마한, 6세기 중엽 백제병합 논문 발표
통설인 4세기 마한의 백제 병합설 폐기 논의해야

게재 2021-02-24 16:17:28
영산강 유역 고대 마한시대 최상위 수장층의 고분으로 확인된 영암군 시종면 내동리 쌍무덤(전남도 기념물 제83호) 발굴 현장. 영암군 제공▼
영산강 유역 고대 마한시대 최상위 수장층의 고분으로 확인된 영암군 시종면 내동리 쌍무덤(전남도 기념물 제83호) 발굴 현장. 영암군 제공▼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

서울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고대국가로 출발한 백제는 이후 마한 제국들을 병합하면서 발전해 나갔다. 백제의 마한 병합은 가까운 지역부터 순차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어느 시점에 어디까지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백제가 마한을 병합했다는 기원 후 9년인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과는 맞지 않다. 이미 살핀 것처럼 이후 『삼국사기』 「신라본기」나 「고구려본기」에 마한은 여전히 기원 후 9년 이후에도 등장하고 있고, 중국의 사서인 『진서』 「동이열전」이나 「장화전」에도 3세기 후반까지 마한이 진에 사신을 파견하며 활발한 외교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한이 백제에 완전히 병합되었다고 널리 통용되고 있고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실리는 통설이 이병도의 4세기 병합설이다. 이병도가 주장한 4세기 백제의 마한 병합설의 핵심 근거는 『일본서기(日本書紀)』 「신공기」 49년조(神功紀, 249)의 다음 기록이다.

"신공황후 49년 봄 3월에 황전별과 녹아별을 장군으로 삼았다.…… 모두 탁순(卓淳)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화본(比自火本), 남가라(南加羅), 녹국(鹿國), 아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였다. 군사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古奚津)에 가서 남만(南蠻)의 침미다례(沈彌多禮)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때 그 왕인 초고(肖古)와 왕자 귀수(貴須)가 군사를 끌고 와 모였다. 비리(比利), 벽중(辟中), 포미지(布彌支), 반고(半古) 4읍은 스스로 항복하였다."

왜의 신공황후가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를 격파하고 가야 7국을 평정한 다음 고해진(강진 지역으로 추정)을 거쳐 침미다례(해남 백포만 일대로 추정)를 정복하였고, 그 침미다례를 백제에게 주었다는 내용이다.

일본서기」
일본서기」

오늘 『일본서기』에 나오는 마한의 소국인 침미다례의 정복 관련 기록에 대해서는 학계의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크게 3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마한 전체에 대한 정복, 둘째가 5읍만 정복한 부분적 정복, 셋째는 해남 지역 마한에 대한 일회성 급습으로 보는 입장이 그것이다. 왜가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는 '침미다례'는 오늘 해남 백포만 지역으로 추정된다. 이에 비해 항복한 마한 소국인 비리·벽중·포미지·반고의 경우 4읍으로 파악하거나, 비리·벽중·포미·지반·고사의 5읍으로 보기도 한다. 학계에서는 5읍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5읍의 위치는 금강 이남 및 노령산맥 이북 또는 전라도 서북지역으로 추정된다.

현재 통설이 된 마한 전체 정복설은 1959년 발표된 이병도의 논문이 출발점이었다. 이병도는 왜의 응원군이 와서 더불어 경략하였다는 것에는 의문이 있지만, 근초고왕의 부자가 전남지역에 원정하여 마한의 잔존세력을 토벌한 것으로 보았다. 즉 이병도는 군사 활동의 주체를 왜가 아닌 백제로 보았고, 공략 지역을 전남지역 마한의 잔읍으로, 정복 시기는 신공기 49년(249)에 120년을 더한 근초고왕 24년(369)으로 본 것이다.

4세기 마한 병합설의 근거가 된 이 기사에 대한 이병도 박사의 해석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군사 활동의 1차 목표로 설정되어 정복된 신라와 가야 7국에 대한 백제 병합은 인정하지 않고, 2차 목표였던 마한 제국만 병합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논리적인 측면에서도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

그러나 마한 관련 기사를 해석하기 이전에 먼저 따져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 기사의 사실성 여부다. 「신공기」 49년은 서기 249년에 해당된다. 따라서 서기 369년 근초고왕대의 사실로 보려면 2주갑, 즉 120년을 더 내려잡아야 한다. 따라서 일본학계에서마저 해당 연대인 249년의 사료가 아니라 설화이며, 『일본서기』 편찬 당시(720년)의 인식을 보여주는 자료로 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침미다례' 침략 직전에 나오는 신라 공격과 가야 평정이라는 사료는 이후 '임나일본부설' 및 '정한론' 논리가 된다. 그러나 오늘 일본에서마저도 '임나일본부'설은 허구로 더 이상 논의조차 되고 있지 않다.

오늘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의 기록을 사실로 인정한다고 해도 해석은 매우 다양하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내용이 설화냐 사실이냐의 여부를 비롯하여 정복의 주체와 시기, 구체적인 정복 지역, 정복 이유, 백제-왜 공동 군사행동의 목적, 정복에 동참한 왜의 실체 등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수많은 견해들이 쏟아지고 있다. 백제가 주체이고 왜가 동참하였다고 보는 견해에 대해서도 왜의 실체를 야마토 정권으로 보는 견해에서부터 북방계 기마민족의 일파, 야마토와 여러 지역의 연합체, 규슈의 해적 집단 등으로 보는 등 다양하다.

백제 전성기의 세력 범위(4세기), 중학교 국사, 2002, 교육인적자원부
백제 전성기의 세력 범위(4세기), 중학교 국사, 2002, 교육인적자원부

백제의 영산강 유역 마지막 마한 4세기 병합설은 현재 교과서에 실려 있다. 그러나 오늘 다수의 연구자들이 다 수용하는 학설은 아니다. 신라나 가야 7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해남 백포만 일대에 대한 일회성 강습에 불과했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을 뿐 아니라, 왜와 안정적이 교역체계를 갖추고 영산강 유역 마한까지 확대해 가려는 과정에서 해남 백포만 일대에 하나의 거점, 즉 교통로를 확보한 것으로 보는 연구 경향이 세를 얻고 있기 때문이다.

2019년에는, 문헌 기록으로는 더 이상 4세기 병합설을 입증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사료를 통해서 보더라도 영산강 유역의 마한이 6세기 중엽이 되어서야 백제의 영역이 되었음을 주장하는 정동준 교수의 논문도 발표되면서, 통설인 4세기 마한의 백제 병합설은 비판을 받고 있다.

영암 내동리 쌍무덤에서 출토된 금동관(편)
영암 내동리 쌍무덤에서 출토된 금동관(편)

동성왕의 무진주 친정

백제가 해남 백포만 일대에 거점을 확보했다고 한다면, 그 시기는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조에서 보듯 4세기 후반이었다.

그런데 4세기 말부터 고구려의 남하정책이 개시되면서 국제 정세는 크게 변하였다. 고구려가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남하정책을 본격화하였고, 475년에는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백제는 한성을 버리고 웅진으로 천도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백제의 영산강 유역 마한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은 둔화될 수 밖에 없었다.

그 이후 백제는 문주왕·삼근왕을 지나 동성왕(東城王, 재위 479~501)에 이르러 중국의 남조와 외교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해 가는 한편 신라와의 관계를 개선하면서 고구려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그렇지만 백제 왕실은 귀족세력의 발호를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였고 밖으로는 왜 세력의 부상을 제지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성왕 20년인 480년의 '탐라(耽羅)'의 조공은 백제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런데 498년에 이르러 탐라가 백제에 등을 돌리고 공납을 바치지 않게 되었고, 이에 동성왕은 친히 공격에 나선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0년조의 "동성왕은 탐라가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는다 하여 친히 정벌하여 무진주(武珍州)에 이르렀는데, 탐라가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죄를 빌자 이내 멈추었다"는 기사가 그것이다.

이때 동성왕이 친히 정벌하려던 탐라는 제주가 아닌 해남·강진 지역에 대한 다른 이름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해남·강진 지역은 4세기 후반 단계에 백제의 해상 교역의 거점으로 활용한 적이 있는 곳으로 근초고왕이 일회성 공격을 했던 곳이기도 했다. 해상 교역의 거점이었던 이곳 세력집단이 일시적이나마 백제에 등을 돌리고 왜 세력에 동조하려는 조짐을 드러냈을 가능성은 높다. 그리고 그 결과 백제에 바치던 공부(貢賦)가 중단되었던 것이다.

이에 동성왕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무진주에 이르자 깜짝 놀란 탐라(해남·강진 지역)가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다시 충성을 맹세하게 되었던 것이다.

498년 동성왕의 무진주에의 출병은 백제의 영산강 유역으로의 진출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단순히 '탐라'의 항복을 받아내는데 그친 것이 아닌, 영산강 유역 마한사회와 반 백제세력, 그리고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던 왜 세력에 대한 무력시위였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국내외 정세에 비추어볼 때, 백제가 영산강 유역의 마한 사회를 일시에 제압할 수는 없었다. 웅진 천도 이후 문주왕의 피살에 이어 동성왕의 피살까지 이어지면서 백제는 여전히 불안정한 정국이었고, 고구려의 위협이 여전히 상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본다면 백제가 영산강 유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여 마한의 잔존 세력을 완전히 제압했던 것은 동성왕을 이은 무령왕(재위 501~523)과 성왕(재위 523~554)대에 가서야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근초고왕대인 4세기 백제의 마한 병합설은 이제 폐기되어야 할 시점에 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