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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임란 조·명 연합 수군의 본영, 완도 고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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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태의 남도역사 이야기>임란 조·명 연합 수군의 본영, 완도 고금도

고금도, 임란 마지막 3도수군통제사 본영
노량서 순국후 80여 일간 월송대에 안장
明 수군 주둔하면서 세운 관왕묘비 남아
고금도에 조·명 수군 연합 최후일전 준비
고금도에 조·명 수군 연합 최후일전 준비

게재 2020-12-22 16:30:16
고금도 충무사 항공사진 완도군 제공
고금도 충무사 항공사진 완도군 제공
고금도 월송대
고금도 월송대
고금도 관왕묘비
고금도 관왕묘비

이순신의 혼을 품은 땅, 고금도

이순신을 모신 사당은 전국에 21개소나 된다. 아마도 이순신은 가장 많은 사당에서 제사밥을 얻어 드시는 존경받는 인물이 아닐까 싶다. 21개 사당 중 하나가 임란 당시 마지막 3도수군통제사의 본영이 있었던 완도 고금도에 건립된 충무사다. 충무사가 위치한 고금도 덕동리 일대는 이순신의 살아생전 마지막 흔적을 품고 있는 곳으로, 충무사 일대가 사적 제1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 충무공 유적지에는 사당만 있는 곳이 아니다. 노량전투에서 순국한 후 시신이 80여 일간 안장된 월송대가 있고, 명나라 수군이 주둔하면서 세운 '관왕묘'의 내력을 기록한 관왕묘비도 남아 있다.

1597년 9월 16일(음력) 명량에서 대첩을 거둔 이순신은 군산 선유도, 목포 고하도를 거쳐 1598년 2월 17일 8천여 수군을 이끌고 완도군 고금면 덕동리에 3도 수군통제사영을 설치한다. 고금도는 남해에서 서해로 진입하는 길목으로 왼쪽에는 마량, 오른쪽으로는 약산의 좁은 수로를 두고 있는 군사적 요충지이면서, 섬 안이 기름져 군량미를 확보하기가 쉬운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순천 왜성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을 방어하기에도 적절했다.

조선 수군이 고금면 덕동리에 본영을 설치하자, 서울 한강에 머무르고 있던 명나라 수군 진린(陳璘, 1543~1607) 제독 휘하 5천 수군이 동작나루에서 선조의 전송을 받고 고금도로 출발한다. 서해안을 따라 남진한 후 7월 16일 고금도에 도착하여 덕동리에서 조금 떨어진 묘당도에 진을 쳤다. 이때 진린은 묘당도에 관우를 제사지내고 명나라 수군의 안녕과 승전을 기원하기 위해 관우의 사당인 관왕묘를 세운다. 묘당도는 충무사가 있는 곳으로 고금도에 딸린 섬이었지만, 지금은 간척되어 고금도와 한 몸이다.

고금도에 명나라 수군이 도착하면서 조선 수군과 연합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고, 11월 19일 노량해전을 통해 임진·정유재란의 전쟁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고금도는 이순신의 혼을 품고 있는 장소일 뿐 아니라 조·명 연합군이 힘을 합쳐 임진왜란을 마무리한 국난극복의 뜻깊은 장소가 아닐 수 없다.

이순신 시신을 안치한 월송대

고금도의 충무사 사당과 시신을 처음 안장한 월송대, 그리고 관왕묘비가 있는 고금도 현장을 찾아가는 길은 이제 쉽다. 뱃길이 아니어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순신의 혼이 묻어 있는 고금도를 찾아가는 길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해남에서 완도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완도대교·신지대교·장보고 대교를 거쳐가는 방법이 그 하나이고, 또 하나는 강진 마량에서 고금대교를 거쳐 가는 방법이다.

필자가 고금도를 다시 찾은 12월 중순, 초겨울인데 세찬 바람이 불었다. 코로나 19로 잔뜩 움츠리고 있던 차에 차가운 바람까지 불어, 충무공 유적 현장에는 참배객 한 사람 볼 수 없었다. 차가운 바람만이 충무사를 지키고 있었던 셈이다.

고금도 이충무공 유적지 주차장 입구에는 1.2미터 크기의 하마비가 서 있다. 말에서 내리는 장소는 이젠 차에서 내리는 장소가 된다. 고금도 충무사 성지는 크게 충무사와 월송대다.

조그마한 동산 월송대(月松臺)에 오르면 이순신 시신을 안치한 '충무공 이순신 가묘(假墓) 유허(遺墟)'지가 있다. 이곳이 83일간 이순신의 시신을 안장한 장소인데, 상세한 설명이 안내판에 새겨져 있다. 안내판에는 "이곳은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해를 임시로 안장하였던 터이다. 이순신 장군은 이 고금도에서 수군 본영을 설치하여 수군을 훈련하고 전선을 수리하는 등 군비를 재정비하여 왜적의 침입을 물리쳤다. 장군이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순국하자 본영이었던 이곳에 80여 일간 안장한 후 이듬해에 충남 아산(현충사 근처)으로 옮겼다"라고 새겨져 있다.

이순신 장군의 시신을 83일간 임시 안장했던 유허지가 있는 월송대는 생전의 이순신이 밤이면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던 작은 동산이다. '소나무 사이로 달이 비춘다'고 해서 '월송대'란 어여뿐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지금 월송대의 해송은 당시의 소나무는 아니지만, 이순신 장군의 시신을 지켜본 전설을 이어받아서인지 아름답다 못해 거룩해보였다. 시신이 안치된 유허지는 출입하지 못하도록 낮게 쇠 담장이 쳐져 있었지만, 유해를 안장했던 장소는 조금 볼록하게 만들어져 있어 쉽게 눈에 띈다. 한여름에도 유허지 주변에는 풀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주민들은 "장군의 기가 서려 있어 풀이 자라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고 한다. 그 말이 사실인듯도 싶다.

충무사 입구 바닷가 쪽에는 1990년 세워진 '고금도 이충무공 유적기념비'도 서 있다.

관왕묘비와 충무사

고금도 충무사의 건립 과정이 다소 흥미롭다. 원래 충무사 터는 중국 촉나라 장수인 관우(關羽, ?~219)를 모시는 사당, '관왕묘'였다. 1598년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이 묘당도에 도착한 후 관우에게 제사지내고, 명나라 수군의 안녕과 전승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관우 사당이 관왕묘다. 관우는 삼국 시대 촉나라의 장수로 『삼국지』에 나오는 중심인물이다. 유비, 장비와 도원결의로 의형제를 맺고, 유비를 보좌하여 손권의 연합군과 함께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대군을 격파했던 인물이다. 관우는 후일 공자와 함께 중국인에게 '문무이성(文武二聖)'으로 일컬어진 인물이다. 공자가 문인을 대표하는 성인이라면, 관우는 무인을 대표하는 성인으로 숭배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명나라 수군에게 관우는 멘토였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생명까지 지켜주는 수호신이었다. 관우묘가 건립된 이유다. 이후 1666년(현종 7) 동·서무를 지어 동무(東廡)에는 진린을, 서무(西廡)에는 이순신을 배향하고 곁에 암자를 지어 승려 천휘로 하여금 사당을 관리하게 했다. 이어 정조는 '큰 나라의 뜻에 보답한다'는 뜻을 담은 '탄보묘(誕報廟)'란 편액을 하사하고, 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전사한 명나라 수군 장수 등자룡을 함께 모시게 했다. 사당 이름이 '관왕묘'에서 '탄보묘'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일제강점기에 관우상과 위패 등 유물이 훼손되고 제향이 중단된다.

광복 후인 1953년 관왕묘의 옛 자리에 충무사를 새로 짓고 이순신을 정전에, 노량해전에서 큰 공을 세운 가리포 첨사 이영남을 동무에 모시고 있다.

임란 마지막 3도수군통제영 고금도를 가다

고금도 충무사
고금도 충무사

이순신을 모신 사당 충무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홍살문을 통과한 후 외삼문·중삼문·내삼문 등 세 개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 외삼문을 지나면 충무사란 편액이 붙은 중삼문이 나온다. 중삼문 안에는 두 개의 건물이 서 있는데 유생들이 공부하는 집 서재(西齋)와 동재(東齋)다. 그리고 서재 뒤편에는 전남 유형문화재 제336호로 지정된 관왕묘비(關王廟碑)가 서 있다. 관우를 모신 관왕묘는 명나라 수군들의 안녕과 승전을 기원하기 위해 건립되었지만, 이후 이순신과 진린, 등자룡 등을 추가 배향하면서 한·중 우의를 다진 사당이 된다. 그러나 오늘 관왕묘는 헐리고 관왕묘의 건립시기와 관리 과정 등을 기록한 관왕묘비만 남아 있다. 관왕묘비는 좌의정 이이명이 비문을 짓고 경상우도수군절도사 이우항이 글을 쓴 비로, 1713(숙종 39)에 건립된다. 이 비는 관왕묘의 역사를 포함, 묘당도가 조선과 명나라 연합 수군의 근거지였을 뿐만 아니라 한·중의 우의마저 보여주는 유물이다. 그런데 관왕묘비로 들어가는 입구부터 길이 좁다. 비문은 육안으로 읽어내기도 어려웠고, 비 보호를 위해 만든 비각(碑閣)속에 갇혀 있는 모습도 답답했다.

내삼문을 통과하자 세 개의 건물이 또 나타났다. 사당 충무사와 동무, 서무였다. 옛 관왕묘가 있던 자리에 위치한 충무사는 정면 3칸, 옆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당당했다. 사당 안에는 이순신의 표준 영정과 '증영의정행삼도통제사충무이공신위(贈領議政行三道統制使忠武李公神位)'라 새긴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사당 안에는 전남 문화재자료 제163호로 지정된 '우수영전진도첩(右水營戰陣圖牒)'도 있다. 전진도첩은 전라우수영의 군사조직과 운영실태, 작전을 어떻게 수행하고 있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준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크다.

고금도를 떠나는데 또 필자를 붙잡는 것이 또 있다. 고금항일운동충혼탑이다. 이현열·이기홍 등 항일농민운동가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고금도는 임진왜란 당시 마지막 3도수군통제사의 본영이 설치되었던 항일과 구국의 현장이었을 뿐 아니라 일제하 치열하게 전개된 항일 농민운동의 현장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