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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과 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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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과 호남

게재 2020-11-24 18:15:10

송강 정철(松江 鄭澈·1536년~ 593년)은 서울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다. 을사사화에 연관돼 유배를 당한 아버지가 1551년 귀양에서 풀려나자 가족들은 담양 창평으로 이주한다. 이곳에서 송강은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10년 간을 보내면서 임억령·김인후·송순·기대승 등 호남의 거유들에게 학문을 배웠다. 그는 48세에 예조판서,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다시 창평으로 돌아와 4년간 은거생활을 했다. 이때 지은 것이 '사미인곡'· '속미인곡'·'성산별곡'이다. 창평은 그의 고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송강은 우리에게 정치인보다는 문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 국문학사에서는그를 관동별곡, 성산별곡,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을 남긴 가사문학의 대가로 칭송하고 있다. 그는 한글로 된 시조 76수와 한시 758수, 산문 427편도 남겼다. 그의 가사와 단가는 한문 투를 벗어나 자유자재로 우리 말의 묘미와 말결을 아름답게 살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가 무등산 자락에서 지은 성산별곡은 김성원이 세운 서하당과 식영정을 중심으로 계절에 따라 변하는 경치와 김성원의 풍류를 예찬한 노래로 우리 지역으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송강은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서인의 영수였던 그는 정적인 동인들과 끊임없이 대립하면서 당파 싸움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 전주 출신 정여립의 모반사건이 일어나자 54세의 정철은 우의정으로 발탁돼 금부에서 옥사를 다스린다. 이른바 기축옥사(己丑獄事)다. 이 사건으로 동인 1000여 명이 화를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당시 국문 기록 등이 사라져 그 말은 과장됐을 가능성이 크다. 정철의 기축옥사 당시 행적은 학계에서도 이견이 분분하다.

내년 담양에 개교하는 전남1호 공립대안학교에 대한 교명이 '송강고등학교'로 결정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일부에서는 정철의 호를 딴 송강고의 명칭이 부적절하다고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무안 남악신도시 중앙공원에 설치된 전남 출신 역사 인물 12명의 흉상에 정철이 포함된 것도 함께 논란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가설로 송강 정철을 재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실상 호남 출신인 그가 아무리 정적이라고 해도 호남 출신을 의도적으로 처단했을 리 없다. 이런 논란이 이는 것 자체가 지역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박상수 주필 sspar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