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창·노영필> 전교조 선거, 그리고 교육희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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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의창·노영필> 전교조 선거, 그리고 교육희망은?
노영필 교육평론가·철학박사
  • 입력 : 2020. 11.22(일) 14:20
  • 편집에디터
노영필 교육평론가·철학박사
"전교조, 왜 그래!"

우리 지역 교육계는 성윤리 수업을 둘러싼 민원을 두고 현장과 교육청의 줄다리기가 팽팽하다. 교육청의 민원은 봇물을 이루고 있다. 교육청의 대응조치는 현실을 외면하고 특정 정치세력을 위한 처세만 있다는 불균형에 대한 비판들이 들려온다. 사실 교육감이 전교조 지부장 출신일 뿐, 전교조 전체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전교조를 두고 책임추궁을 하는 형국은 씁쓸하다.

전교조 내부 선거를 들여다보면 '왜냐?'는 질문에 대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전교조는 내부의 큰 선거를 2년에 한 번씩 치른다. 전국의 위원장과 17개 시도 지부장을 뽑는 선거다. 이들의 선출이 전교조의 정치적 처세와 맞닿아 있다. 지부장 경력은 교육자치 수장인 교육감 진출의 중요한 경력으로 작용해 지금은 전국적으로 10명에 이른 게 현실인 점이다.

사실, "왜"라는 질문은 시민으로서 만족도가 낮다는 불만을 깔고 있다. 그 이유는 뭘까? 광주시 교육감은 지부장 출신으로 3선 중이다. 그런데도 시민단체마저 비판적 태도로 지지를 철회하였다. 협력적 거버넌스는 멈춘지 오래고 교육감의 부정비리를 고발한 주체가 되었다. 2년이 넘도록 날마다 교육청 앞에서 교권침해와 행정폭력에 대한 항의집회가 열리고 있음이 작금의 상황을 말해준다.

전교조는 1989년 탄생하자마자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탄압의 칼날은 교육을 사랑하는 온 세상 사람들을 울게 만들었다. 그때만 해도 해직교사들은 전교조 조합원이라는 소속감으로 자부심을 갖고 얘기하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교육민주화선언 이후 수많은 교사들이 교육 민주화와 참교육의 가치를 중심으로 잘못된 교육 현실을 바로 잡기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해직되고 구속되었다.

그럼에도 30여년이 넘는 세월의 피로도는 모두에게 공감을 일으켰던 열정과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그대로 확장되지 못한 점 앞에 아려온다. 10만 조합원에 가까웠던 조직은 반토막에 그치고 젊은 교사들의 관심은 차갑다. 변화하는 현장의 수요와 달리, 학생들도 낯설고, 사회적으로도 눈총이 따가울 만큼 전교조의 역할은 겉돌고 있어서다. 명성이 살아나고 전통에 빛나는 모습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눈살이 찌푸려진 이유는 뭘까?

"'가만히 있으라'고 가르치지 않겠습니다."는 사회적 공감이 세월호의 아픔을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다. 그러나 최근, 스쿨미투를 둘러싸고 교권과 학생인권이 충돌한 상황에서도 어떠한 역할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학생들에게 '보호'만 외치고 성평등의 '주체'로 나서라고도 가만히 있으라고도 말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위치로 추락하면서 사단이 났다.

교육현장이 무중력상태에 빠지고 전교조가 위기에 몰린 이유는 원칙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교육행정을 책임지기 위해 전교조 조직을 떠나는 순간 동지가 아니다. "교섭의 상대가 되는 것이지, 같은 편으로 보는 것 자체가 문제다" 그 열정과 냉정을 구분하지 못한 무비판이 만든 결과가 아니었을까? 왜곡된 아이들 사랑과 다듬어지지 않은 공정성을 망각한 정치적 진출은 희망을 잃게 하고 불신을 더했을 뿐이다.

슬프다. 30여년 전 세대가 빛바랜 것은 남아있는 사람의 몫일까? 시대정신을 읽으려는 교체된 세대들의 목소리가 들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고루함'을 지키려는 사람들과 '신선함'으로 바꾸려는 사람들이 경선으로 맞선 것이다. "무능한 교육감, 눈치 보는 전교조, 우리가 바꾸자"라고 구호를 낸 사람들이 그들이다. 내부비판이 제대로 날을 세운 셈이다.

이번 선거의 내용상 쟁점은 배이상헌교사의 교권을 둘러싼 갈등과 행정폭력에 대한 인권 감수성의 차이로 드러났다. 전교조가 학생들과 시민들의 품으로 되돌아오겠다는 선언이 될 것인지 명칭변경으로 옷만 바꿔입고 그대로 멈출 것인지 관심을 끌게 한다. 보통 조합원 교사들은 차이를 구분할 만큼 변별력을 갖지 못한 채 선택의 기로에 선다. 핵심은 교육할권리와 참교육의 실질적 환경을 구축하는 쪽을 찾는 게 급선무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 새지 않도록 말이다.

민주화가 진화되면서 세력별로 민주의식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교총이 교권을 보호하기 위해 소송비를 지원해준다느니 수업혁신을 위해 적극적인 연수를 유치한다느니 하는 말들이 들린다. 그런 실질적인 권리 지원과는 달리 전교조는 두세배 넘는 회비를 내고도 돌아오는 혜택이 없다는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지고 있다. 거기다가 수업권을 둘러싼 교권과 학생인권이 권리논쟁으로 번져 머리만 아프다는 게 대중의 정서다. 교사들 내부의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밖으로 넘치니 "전교조 왜 그래?"로까지 이어진 셈 아닐까.

전교조는 한때 교육희망을 책임졌다. 그 책임있는 시절이 그립다. 그런 점에서 이번 선거 결과가 기대된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