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32> 이슬람교와 투르크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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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노휘의 길위의 인생
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32> 이슬람교와 투르크족의 역사
※ 차노휘 : 소설가, 도보여행가
  • 입력 : 2020. 07.30(목) 13:37
  • 편집에디터

32-1. 아야 소피아(Ayasofya) 사원. 이스탄불로 여행 온 한국인 가족들과 인터내셔널 가이드인 오메르. 바닥에 천장 돔 크기가 그려져 있다. 바닥 한 중앙에 폰을 두고 찍었다.

1.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Muhammad)

종교는 어떤 사람이나 나라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는 핵심적 요소 중 하나이다. 전 세계 77억 인구 중 이슬람교 신자가 18억 명이나 된다(가장 큰 종교 규모는 천주교, 개신교, 동방정교회, 성공회 등을 포함한 기독교이다).

이슬람권에서 가장 보수적인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이다.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에 만들어진 종교서(샤리아; Sharia)가 유일무이하게 국가법으로 남아 있는 나라이다. 18억 무슬림들 또한 현실에서 샤리아의 지배를 직접적으로 받고 있지 않더라도 간접적으로나마 정신적 영향을 받고 있다. 이 모든 것을 창시한, 이슬람교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사람은 무함마드(570~632)이다.

중세 이슬람 최고 역사가로 꼽히는 이븐 할둔(Ibn Khaldun)은 그의 대표작 《역사서설》에서 무함마드를 "우리 주인이자 보호자이고 아랍 민족의 예언자이며 토라와 복음서에서 언급되어 있는 아랍 민족의 주인이시다."라고 정의한다. 토라(Torah)는 유대교 율법서를 말하나 좁게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로 구성되어 있는 구약성서 중 모세오경을 가리킨다. 복음서는 지금의 신약성서이다. 신약 4대 복음서에는 마태·마가·누가·요한복음이 있다.

유대교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인정하면서 출발한 이슬람교가 태동할 당시 아라비아 반도는 부족사회였다. 최초로 통일한 사람은 무함마드이다. 그는 세속적인 왕이면서 최고의 종교 지도자가 되었다. 이들에게 아랍인이라는 정체성까지 부여했다.

2. 무함마드의 생애

무함마드는 570년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에서 유복자로 태어난다. 여섯 살 때 어머니가 죽자 할아버지 집으로 가나 조부도 곧 세상을 떠난다. 숙부 밑에서 성장하면서 청년이 된 그는 거대한 상단에 말단 직원으로 입단한다. 상단 주인은 30대 과부 카디자였다. 그녀는 자신의 재산을 지켜 줄 영리한 남자와 재혼하기를 원했다. 마침 그녀의 눈에 무함마드가 들어온다. 그녀는 열다섯 살 어린 그에게 프러포즈한다.

물질적인 풍요를 얻은 무함마드는 자주 명상을 한다. 동굴에서 명상을 하던 어느 날, 갑자기 몸에 압박이 오더니 머릿속에서는 "읊어라!"라는 말이 울려 퍼진다. 두려움을 느낀 그는 카디자에게 말한다. 카디자는 그를 안심시킨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게 당신이 기다리시던 신의 음성이 아닐까요?" 그때부터 무함마드는 신의 계시를 받는다.

이슬람교에서 신을 '알라'라고 한다. 아랍어로 '신'이라는 뜻이다. 만신 사상이 성행했을 때도 각 종단 신은 알라였다. 특별하게 없는 어휘를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기독교와 유대교에서 언급되는 '야훼'처럼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고 기도하는 자에게 응답을 해주며 믿는 자에게 복을 내리면서 믿지 않는 자에게 벌을 주는 인격신이다. 천국과 지옥 형벌에 대해서도 말한다.

신의 계시를 받은 무함마드는 몇 가지 율법을 내세운다. 철저한 우상숭배, 고리대금, 술, 마약 등을 금지시킨다. 당시 메카는 상공업 중심지였다. 먼 길을 떠나기 전에 무사하기를 빌었던 유명한 만신전이 있어서 다양한 종족들이 왕래했다. 공식적인 규율이나 도덕규범 같은 것은 없었다. 그래서 무함마드가 제시한 율법은 혁신적이고 개혁적이어서 전통에 대한 도전으로 사람들은 받아들였다. 무함마드는 쫓겨나야 했다.

그는 메카에서 400km 떨어진 메디나에서 세력을 키운 뒤 메카를 정복한다. 정복에 성공했을 때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은 만신전에 있는 신상과 우상을 싹쓸이 쓸어버린 거였다. 그러고는 외친다.

"알라후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

메카를 이슬람교 성지로 선포하기에 이른다.

3. 투르크족의 역사 그리고 현재

현재 터키 인구 98.4%는 무슬림(수니파)이다. 하지만 아랍인이 아니다.

터키의 역사는 '돌궐'에서부터 시작한다(돌궐은 스스로를 흉노의 후손이라고 칭하나 문자로 남아 있지 않아 분명한 증거는 없다). 중국에서 기원 6세기 이전에는 흉노라고 했고, 수·당 때는 돌궐이라 했다. 이들은 싸움을 잘했다. 중국인들에게 '천고마비(天高馬肥)'는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찌면 흉악한 유목민(흉노족)이 약탈하러 올 거라는 '공포의 말'이었다. 진시황제는 만리장성까지 쌓아 방어했다. 흉노족은 스스로를 투르크(튀르크)족이라고 했다(Turk를 변형한 나라 이름이 Turkey이다. 옛 중국어 발음인 '투쿠어'에서 '돌궐'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투르크어로 투르크는 '강하다'라는 뜻이다.

8세기에 돌궐이 망하자 동돌궐은 중국에 동화되고 서돌궐은 좀 더 좋은 땅을 찾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한다. 아라비아 반도를 지나지만 문화와 종교(이슬람교)를 받아들인 제국은 페르시아이다. 페르시아 문명을 받아들인 투르크족은 오늘날 터키 땅인 아나톨리아 반도에 정착한다. 동쪽 끝에 있는 '반'이라는 호수 주변에 터를 잡아 셀주크 투르크 제국을 탄생시킨다. 점점 영토를 넓히지만 세계적인 싸움꾼과 맞닥뜨린다. 칭기즈칸이다.

칭기즈칸에 망한 셀주크 투르크는 1229년 오스만 제국으로 바통을 잇는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이스탄불 바로 아래 도시인 부르사에서 흩어져 있던 부족들을 모은다. 150년이 흐를 즈음 천 년의 역사를 가진 콘스탄티노플(현재 이스탄불)을 정복한다. 동쪽으로는 오스트리아 빈 인근까지, 이집트 포함 북아프리카 전체 튀니지까지, 동쪽으로는 예루살렘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까지 손아귀에 넣는다. 중세 시대에 가장 첨예하게 대립했던 기독교와 이슬람교 성지를 한 제국이 다 차지한 셈이다.

대제국이 되었지만 오스만은 넓은 관용 정책으로 다양한 종교와 소수민족을 포용한다. 술탄과 재상을 제외한 고위직에 기독교인을 다수 채용한다(1800년대 조사에 의하면 오스만 전체 인구 30%가 기독교인이었다). 술탄은 타민족 여인과 결혼하는 등 다양한 혼혈 정책을 오랫동안 이어간다.

620년을 이어오던 오스만은 전형적인 제국의 말로를 걷다가 제1차 세계 대전 때 치명적인 실수를 한다. 전쟁에서 졌을 경우 이스탄불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포기하겠다는 세브르 조약에 서명한 것이다. 1923년 오스만 제국이 멸망하지만 아타튀르크의 맹활약으로 터키 공화국으로 재탄생한다.

지금의 터키 땅에서 투르크족은 천 년 동안 살아왔다. 한 번도 역사적으로 아랍과 섞인 적이 없다. 종교만 이슬람교일 뿐이다. 대부분 내가 만난 터키인들은 아랍 사람들을 종교에 너무 심취해 있고 돈만 많으며 무례하고 시끄럽다고 생각한다. 왕정과 근세 정책을 계속 유지하려는 이들을 살짝 무시하기도 한다. 터키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의 영향이기도 하다. 하지만 터키 공화국 탄생 100주년을 3년 남겨 두고 있는 현재, 에르도안은 세계가 경악할 만한 성명(7월 10일)을 발표했다. 아야 소피아 박물관을 모스크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같은 달인 24일에는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로 개장해서 대대적인 종교의식까지 치렀다.

아타튀르크가 1934년 아야 소피아를 박물관으로 전환한 의도는 비잔티움 예술의 가치를 보존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정치와 종교를 철저하게 분리하고자 하는 세속주의의 정착이었다. 세속주의로 표현되는 철저한 정치와 종교 분리는 선진국으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다시 모스크로 전환하는 것은 지난 지방선거에서의 패배와 지지율 하락에 고민하고 있는 현 대통령 에르도안의 정략적 목적은 아닐까.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도 세속적인 왕이면서도 최고의 종교 지도자였다. 출발부터가 정치와 종교를 분리할 수 없는 이슬람교였다. 이는 기독교와 달리 세월이 갈수록 현재의 이슬람권 나라가 세계 추세와 달리 정체되는, 불행의 씨앗이 아닐까(다음 호에 아야 소피아 사원과 함께 상세하게 다룰 예정이다). 불행의 씨앗을 에르도안은 '자신만의 정치'에 잘 활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 차노휘 : 소설가, 도보여행가

32-2. 아야 소피아 사원은 바실리카 양식이다. 전체 모양은 직사각형이지만 중앙 본당과 복도 등은 아치나 돔형이다.

32-3. 천장 쪽에 성모 마리아 성화가 있다. 그 아래 양쪽으로 알라와 무함마드라고 적힌 아랍식 장식 글자가 걸려 있다. 성화 아래 왕관 같은 문 모양이 미흐랍이다. 모스크에는 메카(동쪽)의 방향을 나타내는 미흐랍(Mihrab)이 꼭 있어야 한다. 두 종교가 한 장소에서 공존한다.

32-4. 미흐랍 옆에는 계단으로 된 민바르(Minbar)가 있다. 민바르에서 이슬람 지도자 이맘이 설교를 한다. 에르도안은 이맘이었다.

32-5. 아야 소피아 사원은 15층 높이이다. 2층은 7미터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곳은 계단이 아니라 비탈길이다. 가마를 타고 오는 여자들을 위해서이다.

32-6. 아야 소피아 사원은 새벽에 봐야 아름답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