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순간에 담은 생의 대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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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기획
찰나의 순간에 담은 생의 대서사
포스트코로나 시대:살아남기 작업하기 살아가기 3〉 이다겸(41)작가||대구출신, 고려대 미대 졸업 후 8년간 독일에서 유학||귀국 후 대구, 영천, 중국 이어 광주에서 레지던시||레지던시에서 터득한 작업 작가만의 정체성 형성
  • 입력 : 2020. 07.30(목) 17:51
  • 박상지 기자

이다겸 작 'walk in the scene 3'

키클롭스 신화에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 객기를 부리다가 불행을 자초한 오디세우스의 이야기가 나온다.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귀향길에 오른 오디세우스는 외눈박이 거인족 키클롭스가 모여사는 섬에 도착한다.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폴리페모스가 살고있는 동굴을 찾아갔다. 난공불락 트로이가 누구덕에 함락됐는지 아느냐고, 자신을 목청껏 알린 오디세우스의 공명심은 부하들이 산채로 폴리페모스에게 잡아먹히는 비극을 가져왔다. 열두명의 부하를 차례로 잃고나서야 오디세우스는 정신을 차렸다. 괴물앞에 바짝 엎드려, 자신은 오디세우스가 아닌 '우티스(nobody)'라고 소개한다. 그리고 최고의 포도주로 폴리페모스를 잠재운 뒤 괴물의 눈을 찌르고 도망쳤다. 폴리페모스의 절규를 듣고 동료 키클롭스들이 찾아와 묻는다 '누가 너에게 이런 몹쓸 짓을 했느냐'고. 폴리페모스는 '우티스'라고 대답했는데, 동료들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의미로 알아듣고 그냥 돌아갔다. 오디세우스가 키클롭스들로부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전쟁영웅이라는 그의 정체성을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타지에서의 삶은 '겸허'를 가르침으로써 이방인을 성장시킨다. 대구출신 이다겸(41)작가의 작업의 원천은 '이주'에서 비롯됐다.

●살아남기: 이주, 배움의 시작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이후 독일 쾰른에서 8년을 머물렀어요. 대구에서 나고 자랐지만, 대학생활은 서울에서, 또 생의 1/3을 독일에서 보낸 탓에 특별히 '어느지역 출신'이라는 표현이 어색해요.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떠남, 이주, 여행'의 필요성을 깨닫게 됐죠. 저는 지금까지 여러지역에서 레지던시에 참여해 왔는데, 그 시작이 바로 독일이었습니다."

첫 레지던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집시, 장애인을 학살했던 장소였다. 예술공간으로 바뀐 비극의 장소엔 이 작가를 비롯해 중국, 일본, 프랑스, 독일 출신의 작가와 큐레이터들이 모여들었다.

"굉장히 불편한 공간이었고, 한달동안 타국의 작가, 큐레이터들과 생활했었는데, 단 한번도 마찰이 발생하지 않았어요. 그들 중에는 지긋한 연세의 교수도 포함돼 있었는데 교수와 학생이 아닌 예술가라는 동등한 입장에서 각자의 작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죠. 가장 인상적인 배움은 상대에 대한 배려과 존중이었습니다. 재능있는 예술인이기 전에 배려와 존중을 아는 인격체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죠."

이 작가에게 타지에서의 낯섦은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8년간의 독일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자 마자 가장 먼저 했던 일은 국내 레지던시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대구 가창창작소를 거쳐, 중국 항저우에서의 단기연수, 경북 영천 창작소, 광주 호랑가시나무창작소에서의 레지던시까지 이주의 역사가 나이테처럼 쌓여갔다.

● 작업하기: 선 속에 담긴 '우리 이야기'

"어릴때부터 이야기를 만드는 것에 대해 관심이 많았어요. 욕구가 강했죠. 회화를 전공했지만 그림보다는 사진, 영상작업을 더 많이 했어요. 이야기를 담는데 더 사실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서양화 전공이라 미디어 아트엔 다소 서툴렀지만, 졸업작품으로 만든 애니메이션이 영화제 공모에서 당선이 되기도 했다. 졸업 후 독일에서 미디어아트를 본격적으로 배우고 그 안에 무수히 많은 삶의 이야기들을 담아볼 계획이었다. 막상 독일에서 접한 미디어아트는 이 작가의 작업과는 괴리가 깊었다. 방황이 시작됐다.

"하루는 구글에 내 이름을 쳐봤어요. 의외로 미술작가 중에 '이다겸'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가가 많더라고요. 뉴욕의 미디어아티스트, 영국의 일러스트, 그리고 나. 내 이름 하나하나에 다양한 인생이 담겨져 있는게 신선했어요. 이것을 소재로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욕심처럼 안고있는 미디어아트보다는,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장르로 작업을 시작하게 됐어요."

연필을 쥐고 드로잉을 시작했다. 실루엣을 그린 다음 인터넷에 작업주제를 검색한 뒤 검색된 정보를 실루엣 위에 씌우는 작업이 이 작가 작품의 시초가 됐다. 무수히 많은 정보를 담은 텍스트들이 중첩되면서 하나의 선이 완성됐다. 인물에 관한 정보에서 시작된 작업은 풍경화로 발전됐다. 친구들의 아뜰리에, 파리 번화가의 한 장면 등의 풍경이 이 작가만의 선을 통해 완성됐다. 찰나의 순간이 담긴 풍경이지만, 풍경을 만들어 낸 선 안에는 그 장소와 관련된 무수한 역사와 이야기들이 담겨있었다.

"모든 작업에 글쓰기 라는 의미를 부여해요. 책은 한권을 다 읽어야 이야기를 알 수 있지만, 제 작업은 한장의 이미지 안에 책 한권이 들어가 있는 것이죠. 장소와 인물에 관한 정보로 완성된 작품이지만, 그 이상의 것을 담아내고 있기도 해요. 마치 수행과도 같은 작가의 작업방식이죠. 문장처럼 주어, 목적어, 동사의 구조를 갖추고 있지 않아도, 한컷의 이미지가 순간의 감동을 주는 이유는 작가가 수행하는 시간을 한번에 볼 수 있기 때문이죠."

●살아가기: 화면에 옮겨진 도시의 이야기

최근에는 도시 속 지극히 사소한 장면에 주목하고 있다. 익선동 골목가 주택앞에 널브러진 화분, 광화문 광장앞에 소담스레 피어있는 꽃, 중국 단기연수 중에 들른 서호의 꽃밭 등이다. 지난 5월 광주 남구 호랑가시창작소에서 레지던시를 시작하면서 호랑가시나무 언덕에 피어있는 꽃들에도 주목하고 있다.

"최근들어 '꽃'그림을 그리면서 '예쁜 그림만 그리려는게 아니냐'라는 오해를 받곤해요. 예쁜 그림이 아니라 도시에서 찾아낸 작은 풍경을 담는작업이거든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지속적인 꽃 작업을 통해 보여줄 계획입니다."

지난 5월 이 작가가 광주에서 처음으로 레지던시를 시작했을때 호랑가시나무 언덕에는 장미가 만발했다. 6월에는 능소화가 피었고, 7월에는 백합이 한창이다. 꽃의 생의 주기를 광주와서 처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옛 선교사들의 온기를 품고있는 양림동과 그 안에서 작은 공동체를 만들며 살아가는 양림동 작가들을 이 작가는 어떻게 작품으로 기록하게 될까.

이다겸 작 'plot about dream'

이다겸 작 'a casual plot 2'

박상지 기자 sangji.park@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