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26> 분리 장벽 그리고 뱅크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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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노휘의 길위의 인생
차노휘의 길 위의 인생 26> 분리 장벽 그리고 뱅크시
※ 차노휘 : 소설가, 도보여행가
  • 입력 : 2020. 05.07(목) 13:09
  • 편집에디터

26-1. 분리 장벽을 바라보는 아랍 여인들. .

1. 여행 중 휴식

집을 떠난 지 두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카미노 데 콤포스텔라(포르투갈 길)를 30일 넘게 걸은 뒤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었던 이집트에서 열흘, 사막 바람을 맞으며 열흘 동안 운전만 했던 요르단을 거쳐 마지막 일정인 이스라엘에서 13일을 보내기 위해서 왔다. 이스라엘은 중동 안의 유럽이었다. 편안하고 안전하다고 확신하자 나는 그만 쉬고 싶어 졌다. 예루살렘에서 5일만 머무르고 텔아비브로 떠나야 했지만 이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르기로 했다.

내 숙소는 아파트였다. 주인이 가끔 둘러보러 오지만 여행객들에게 어떤 간섭도 하지 않았다.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있는 베란다에서 다리 뻗고 누워도 춤을 추어도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워도 상관하지 않았다. 사용한 그릇만 깨끗이 설거지를 해놓으면 끝이었다.

폴란드 출신 제니와 이곳 토박이인 탐과 그곳에서 작은 파티를 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세계를 돌아다니는 젊은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제니는 숙소 청소를 담당하며 숙비를 절약하고 있었다. 그녀가 구시가지에서 관광은 하지 않고 쇼핑만 잔뜩 했다며 탁자에 옷가지들을 펼쳐놓았을 때 나는 오늘 만난 탐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탐은 내가 교통카드를 만들 때 도와준 이스라엘 청년이다. 여자 혼자 움직이면 친절한 사람을 자주 만나곤 한다. 그도 친절한 사람 중에 한 명이었고 백 명이 넘는 초등학교 급식을 책임지는 요리사였다. 거의 영어를 못하지만 동양인인 나와 맥주를 마시고 싶어 했다.

이 말을 들은 제니는 숙소로 부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베란다는 작은 파티를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탐은 맥주와 이스라엘 위스키를 사 왔다. 프랑스 출신 맥스와 친절한 노미가 뒤늦게 합류했다. 아랍 음악이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왔다. 우리는 국적불명의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여행 중 휴식'을 제대로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다음날인 금요일에는 늦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스라엘 안식일 샤밧(Sabbath)이기 때문이다. 유태인 지구에 숙소가 있는 여행객은 이틀 먹을 식량을 미리 구입해놓아야 한다. 금요일 14시부터 토요일 해질녘까지 유태인의 모든 상점과 교통이 끊긴다. 팔레스타인 식당에 가면 되지만 팔레스타인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불편하다. 나는 샤밧이 끝날 때까지 숙소에서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쉴 계획이었다. 뜻대로 되지 않았다.

2) 한국인 영

돌이켜보면 이번 중동 여행은 내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끊임없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바깥의 원동력'이 있었다. 예루살렘 숙소에서 편히 쉬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욕심이라면 연장한 이틀 안에 구시가지 바위 사원 황금 돔으로 해지는 풍광을 보는 것 정도라고 할까. 이런 게으름이 내게는 용납되지 않았다. 숙소에서 한국인 영을 만났기 때문이다.

내 여행의 경우 한국인 여행객과 거의 부딪치지 않았다. 비교적 현지인이 머무르는(비교적 싼) 숙소를 예약해서일 수도 있다. 설령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같은 나라 사람을 만난다 해도 다른 나라 국적의 여행객들처럼 여행객일 뿐이었다(그만큼 해외 자유여행이 이제는 특별하지 않다). 어느 나라 사람이든 서로 공통된 관심사가 있어야 잠깐이라도 동행이 가능했다.

영은 차를 렌트해서 홀로 성지순례를 돌고 있었다. 나처럼 예루살렘 구시가지 야경을 보고 싶어 하기도 했다. 잘 됐다 싶었다. 혼자 야경을 보러 가기에는 위험한 곳이었다.

그와 함께 예루살렘의 미로 같은 어두운 골목길을 돌아다녔다. 마침 유태인 안식일이어서 통곡의 벽은 키파나 검은 정장에 중절모를 쓴 바리새인들로 북적거렸다. 바위 사원은 무슬림만 출입이 가능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인산인해를 이루는 통곡의 벽 너머로 황금 돔으로 해지는 풍광을 볼 수 있다.

돌아오는 길, 영은 말했다.

"베들레헴에 가고 싶은데 노란 번호판(이스라엘 자동차 번호판 색깔)을 보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돌팔매질을 할 것 같아서 갈까 말까 생각 중입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1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지만 심리적인 거리는 만만치 않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국의 경계 지역이라 분리 장벽과 검문소를 지나야 한다. 여전히 뜨거운 분쟁지역(West Bank)이다. 여행자 보험(이스라엘도 여행자 보험과는 거리가 멀다)과 자동차 보험이 있으나 마나이다. 나는 그에게 딱, 두 마디만 던졌다.

"한번 가기로 결정했으면 가야 되는 것 아닌가요? 그곳도 사람 사는 동네인데 설마, 그렇게 하려고요?"

다음날부터 나는 그를 따라다녀야 했다.

3) 분리 장벽

이틀 동안 영과 서안 지구를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친절했고 평화로웠다. 도로는 넓고 깨끗했다. 기독교 성지 또한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노란 번호판을 보고 돌팔매질 하는 사람도 없었다. 예루살렘과 다를 바 없는 그곳에서 내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분리 장벽이었다.

2002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서안 지구(West Bank)를 둘러싸는 '분리 장벽'을 쌓았다. 콘크리트로 된 장벽은 5~8m 정도 높이에 700km나 된다. 교도소 담장처럼 참호, 감시탑, 철조망 등이 있다. 팔레스타인 무장 테러리스트로부터 이스라엘 주민을 보호하기 위한 명목이지만 서안 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억압하는 통제의 벽이 되었다. 2004년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분리 장벽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인권을 침해한다며 철거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지만 그대로였다.

언제부터인가 그 장벽에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영국 출신 그라피티 아티스트인 뱅크시(Banksy)였다.

뱅크시의 캔버스는 거리 담벼락이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정치적인 풍자와 유머가 담긴 그림을 그려놓고 사라지곤 했다. 분쟁 지역 분리 장벽과 거리에도 어김없이 그의 그림은 자유로우면서 해학적이었다. 전쟁, 권위주의를 반대하고 사회와 세태를 풍자했다. 장벽을 쌓은 이스라엘에 대한 항거이면서 자유(평화)에 대한 갈망이었다.

이틀 동안 팔레스타인국을 돌아다니면서 기독교 성지뿐만 아니라 거리 벽화를 카메라에 담아왔던 나는 이스라엘 영역으로 들어서는 분리 장벽 긴 검문 차량에 들어섰을 때 불쑥 의문이 생겼다. 저 벽은 과연 누구를 위해서 존재하는가?

마침 이라크에 있는 이즈마엘에게 오늘 어땠냐는 문자를 받았다. 나는 시크하게 답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더라, 단지 돈 있고 없고의 차이더라."

※ 차노휘 : 소설가, 도보여행가

26-2. 분리 장벽 그림.

26-3. 예루살렘에 있는 다윗왕의 무덤 내.

26-4. 베들레헴에 있는 예수 탄생 교회.

26-5. 베들레헴의 단체 순례자들.

26-6. 숙소 아파트 베란다에서 열린 작은 파티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