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출산장려'… "젖은 어디서 먹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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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말로만 '출산장려'… "젖은 어디서 먹이나요?"
광주 5개 자치구청 모유수유시설 살펴보니||구청과 동떨어진 보건소에 설치… 안내판은 없어||‘육아 아빠 출입허용’ 현실은 출입금지 ‘여성전용’
  • 입력 : 2019. 11.13(수) 17:54
  • 양가람 기자

A씨는 최근 민원 해결 차 동구청을 방문했다가 황당한 일을 겪었다. 우는 아이를 달래려 겨우 찾은 6층 모유수유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구청 직원도 문을 열지 못했다. A씨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구청 민원봉사실에서 기저귀를 갈고 수유를 할 수 밖에 없었다. 6층 모유수유실은 '직원용'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동구는 보건소 1층 예방접종실 내에 민원인들을 위한 '개방형 모유수유실'을 운영 중이다. 하지만 동구 보건소는 구청과 건물을 달리 사용하고 있고, 모유수유실 안내표지판은커녕 건물 안내도에도 표시돼 있지 않다. 이 탓에 구청 직원들조차 개방형 모유수유실 위치를 정확히 모르는 경우도 많다. A씨가 황당한 일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현실적 이유다.

동구청 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광주 5개 구청 내 모유수유실 현황을 파악한 결과, 거의 대부분의 사정이 비슷했다.

●안내 표지판도 없고

보건복지부 인구보건복지협회가 제시한 모유수유실 운영 권고사항에는 '모유수유시설은 이용하기 편리한 장소에 설치하고, 모유수유시설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안내표지판을 설치'하라고 명시돼 있다.

서구와 북구를 제외한 광주시 3개 자치구청은 모유수유실이 보건소 내에 있다. 문제는 보건소와 구청이 공간을 달리한 경우다. 대다수 보건소가 구청에 인접해 있다고는 하지만 구청 민원인 입장에서 모유 수유를 위해 보건소까지 직접 가야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서구와 북구는 사정이 그나마 나았다.

서구는 보건소와 구청 내부에 모유수유실을 각각 하나씩 마련했다. 보건소 예방접종실 안에는 남녀 모두 사용 가능한 모유수유실이 있다. 서구청 내부에도 개방형 모유수유실이 여자화장실 옆에 마련됐다. 하지만 아쉽게도 수유실 표지판은 따로 설치돼 있지 않았다.

광주 북구 보건소 내 모유수유실에는 기저귀 교환대, 파티션, 아기 체중계 등 시설이 갖춰져 있다. 양가람 기자

북구가 가장 모범적이다. 북구 보건소에는 아기침대, 체중계는 물론 전자렌지와 파티션 등을 갖춘 모유수유실이 있다. 보건소 정문과 후문에서 한눈에 식별가능한 모유수유실 표지판도 설치됐다. 북구청 1층에도 남성은 물론 내외부인 모두 출입 가능한 모유수유실이 여성휴게실 옆에 있다.

●'남성 사용가능' 사실도 모르고

모유수유실 운영 권고사항에는 '육아를 직접 담당하는 아빠들의 출입은 허용'한다는 항목도 있다. 대신 수유실을 이용하는 엄마들의 불편함을 최소화 하기 위해 별도 공간을 마련하거나 파티션, 커튼 등으로 공간을 구분하게끔 했다.

하지만 남성도 수유시설 사용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심지어 구청 관계자조차 해당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남구 관계자는 "남성이라 수유실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여성들이 수유하는 공간에 함부로 들어가도 되느냐"며 되레 취재진에게 질문을 던졌다.

심지어 광산구 보건소는 모유수유실을 '여성전용'으로 못박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아이를 동반한 남성들은 구청 내 수유실이 있어도 사용할 수 없다. 남자 화장실에는 접이식 기저귀 갈이대가 설치돼 있지 않은 곳도 허다해 아이를 돌보는 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각 구청 별로 수유시설을 갖추고 있지만, 이를 활용하는 인원은 거의 없다. 하루 평균 수유실을 찾는 사람은 한두 명 정도로, 시설이 비교적 잘 갖춰진 북구청 수유실 역시 두세 명에 불과하다. 일각에선 위생 상태 등 관리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아이 키우기 좋은 도시' 갈 길 멀고

광주시는 여성권익 신장, 양성평등 사회 실현을 통해 '아이 낳아 키우기 좋은 광주'를 만들고자 노력 중이다. 5개 자치구 역시 '여성·아동 친화도시'를 표방하며 관련 사업들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구청 내 수유시설부터 문제가 지적되는 실정이다.

보건복지부 인구보건복지협회는 지난해 전국의 모유수유시설 실태조사를 했다. 전국 17개 시·도에서 모유수유시설 3259곳을 설치·운영 중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 중에서 공공기관이 782곳(24%), 공공청사가 759곳(23.3%)인 점을 고려하면, 광주가 시청 포함 5개 자치구 모두에 수유시설을 갖췄다는 점에서 크게 나쁜 성적표는 아니다.

하지만 광주시 모유수유시설은 89곳으로, 전국 시·도 평균 191곳에 한참 못미쳤다. 시설 운영·관리 면에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경우도 많아 '아이 키우기 좋은 도시'로 갈 길은 아직 멀다.

인구보건복지협회가 제시한 모유수유실 운영 권고안은 말 그대로 권고 사항일 뿐 강제력이 없다. 더군다나 구청 수유시설은 자치구 자체 예산으로 운영돼 시설 관리 등은 기관의 자발성에 기댈 수밖에 없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지난해 전국 모유수유시설 실태조사는 현황 파악을 통해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고, 쾌적한 수유 환경을 제공키 위한 기준을 마련하고자 실시됐다"며 "올해는 현실적으로 적용 가능한 지침들을 보다 구체적이고 다양하게 세워 표준 가이드라인을 만들 예정이다. 연말에 전국 모유수유시설에 책자 형태로 보급될 것"이라고 말했다.

양가람 기자 lotus@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