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갑의 정원 이야기> 호남 최초의 마을공동체정원 영암 회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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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이야기
송태갑의 정원 이야기> 호남 최초의 마을공동체정원 영암 회사정
  • 입력 : 2019. 08.22(목) 13:06
  • 편집에디터

영암군 군서면 서(西)구림(서호정마을)에 위치한 회사정(會社亭)은 구림 일대의 대동계 모임장소로 이용하기 위해 1646년에 세워진 정자이다.

사람들이 거주하는 생활공간에서 다소 떨어진 산 속에 위치한 대부분의 누정들은 선비들의 학문수양공간이거나 유배 혹은 귀향한 인사들의 은일공간이나 별서정원으로 활용되었다. 그런 연유로 누정은 아무래도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현실 생활공간에서 마을사람들이 함께 했던 공동체문화를 엿볼 수 있는 정자가 있어 눈길을 끈다. 이 정자는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하거나 연중 전통문화행사를 치렀던 곳으로 말하자면 마을의 중심광장이자 마을문화센터역할을 했던 셈이다.

영암군 군서면 서(西)구림(서호정마을)에 위치한 회사정(會社亭)은 구림 일대의 대동계 모임장소로 이용하기 위해 1646년에 세워진 정자이다. 구림 대동계는 1565년경 조행립(曺行立), 현건(玄健), 박성오(朴省吾), 임호(林浩), 박규정(朴奎精) 등에 의해 시작된 이래 현재까지도 모임이 지속되고 있다. 이후 강학(講學), 또는 손님접대, 경축일 행사 등을 위한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구림대동계는 1565년에서 1580년 사이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일종의 동계(洞契)이다.

회사정은 한국전쟁으로 전소되어 주춧돌만 남았던 것을 1985년 복원하였다. 정자 주변에는 노둣돌이 보이고 풍기문란, 불효 등으로 마을규약을 어긴 이들을 묶어놨던 돌도 남아있다. 전쟁으로 인해 정자에 걸려 있던 편액과 제액들은 모두 소실되었으나 다행히 거기에 실린 글들은 '회사정제영(會社亭諸詠)'이라는 책에 수록되어 있어 지금 우리가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회사정 내부에는 구림동중수계서(鳩林洞中契序), 회사정병서(會社亭幷序), 회사정중건기, 시문(詩文) 등 7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1565년 창립된 구림 대동계는 박빈(朴彬)이 구림에 정착한 이후 조직되었는데 박권(朴權), 임구령(林九齡), 임휘(林揮) 등에 의해 향약의 선행 형태로 유지되어 왔었다.

임구령은 3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 임호(林浩 1522~1592)가 본격적으로 상부상조(相扶相助)를 목적으로 구림 대동계(鳩林大洞契)를 창립한 것으로 전해진다. 차남 임혼(林渾 1522~?)의 외손자인 조행립(曺行立 1580~1663)은 구림 대동계의 중수자로서 역할을 하였다. 이 정자는 3·1운동 당시는 독립만세의 기치를 올렸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이 지역 출신 조극환(曺克煥, 1887~1966)은 영암지역의 3·1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영암 장날인 4월 10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구림리(鳩林里)와 영암읍에서 동시에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태극기, 독립선언서, 독립신문, 독립가(獨立歌) 등을 등사해 영암보통학교 학생들에게 주어 배포하도록 하였다.

조극환은 거사 당일 10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더불어 태극기를 들고 구림리 회사정(會社亭) 광장으로 모일 것을 호소하며 만세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들 시위군중은 영암읍으로 향하는 도중에 출동한 일본경찰의 제지로 해산되고, 조극환은 다음 날 시위 주동자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처럼 회사정은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다수결 투표 등 민주적인 원칙을 수행한 민주광장이었고,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머리를 맞대고 나라를 위해 결의를 다지는 항쟁의 장소였다. 회사정은 여전히 500여 년의 전통을 이어온 생생한 역사현장이다. 회사정의 존재감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일화가 있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1672년에 우의정(右議政), 1680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영의정 등을 지낸 바 있는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1689)과 관련한 이야기이다. 문곡이 1675년 우의정을 지내다 숙종 즉위 후 추문을 들어 종실 복창군 이정(福昌君 李楨), 복선군 이남(福善君 李柟) 두 형제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집권파인 남인의 미움을 받아 유배당한 일이 있었다.

바로 영암 풍옥정(風玉亭)에서 유배생활을 했는데 얼마 안 있어 1678년 철원으로 옮겨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곡은 막상 영암을 떠나려하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이웃해 있는 회사정(會社亭)을 지나다가 만감이 교차하여 몇 줄의 짧은 시(詩)로 회포를 풀었는데 다음과 같다. 회사정 앞에는 물이 흐르고(會社亭前水)/잔잔하게 길손을 보내는구나(潺湲送客行)/물 흐르니 오히려 이별이 아쉽고(水流猶惜別)/사람은 떠나지만 정마저 가겠느냐(人去況爲情).

영암 회사정은 화순 물염정, 담양 식영정, 완도 세연정, 광주 호가정, 곡성 함허정, 나주 영모정, 장흥 부춘정 등과 함께 2004년 광주광역시, 관광협회 등이 공동으로 선정한 수려하고 유서 깊은 '호남의 8대정자'가운데 하나로 선정된 바 있다. 역사적 가치, 사회적 가치는 물론이고 솔향기 진한 숲 속에 지어진 회사정은 예나 지금이나 마을공동체정원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우리가 소중히 가꾸어가야할 현재진행형 역사문화자원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비둘기 숲'이라는 뜻의 구림(鳩林)마을,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이다.〉

영암 구림마을은 월출산 서쪽에 위치한다. 마을의 북쪽은 북송정, 동쪽은 동계, 남쪽 산 아래 지역은 고산 혹은 남송, 서쪽은 서호정이라 부른다.

오늘날 낭주 최씨, 함양 박씨, 연주 현씨, 해주 최씨, 창녕 조씨, 선산 임씨 등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구림마을은 신라말기 승려인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의 탄생설화와 관련이 있다. 신라 말 어느 겨울 성기동 구시바위에서 최씨 성을 가진 처녀가 빨래를 하던 중 냇물에 떠내려 온 푸른 오이를 먹고 아기를 가졌다고 한다.

처녀 집안에서 이것을 부끄럽게 여겨 그 아기를 숲속 바위틈에 버렸는데, 며칠이 지난 후에 그곳에 가보니 비둘기들이 아기를 감싸며 돌보고 있었다. 이를 심상치 않게 여기고 다시 아기를 데려와 키웠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그 아기가 훗날 풍수사상으로 유명한 도선국사라고 한다. 이후 이곳은 비둘기 구(鳩), 수풀 림(林)을 쓴'구림마을'이 되었고, 바위는 국사암(國師巖)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이 마을에서 배출된 대표적인 인물로는 백제시대 유명한 학자로 당시 일본에 천자문(千字文)과 백제문화를 전한 왕인(王仁博士)박사가 있다.

구림마을은 약 1,200년 전 통일신라 시대에 한반도 최초로 유약을 칠한 도자기를 생산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또 조선시대 서예가 한석봉(韓石峰)이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석봉은 글을 쓰고 어머니는 떡을 썬 곳이 이 마을이라고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산버들 가려 꺽어 보내노라 님에게'라는 시조로 유명한 기생 홍랑(洪娘)이 사랑에 빠졌던 조선시대의 문장가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1539~1583)도 이곳 출신이다. 회사정이 있는 이곳에는 낭주 최씨(朗州崔氏) 가문의 고가옥인 안용당(安容堂)이 있고, 1681년(숙종7년) 조선초기의 문신 박성건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죽정서원(竹亭書院)이 있다.

또 건립연대와 주체는 알 수 없지만 낭주 최씨 호은 최동식(湖隱 崔東植)의 은거지였던 호은정 湖隱亭)도 있다. 이곳은 한 때 마을도서관으로 사용한 적도 있다고 한다. 정자라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죽림 현징(竹林 玄徵 1629-1702)이 귀향하여 지은 죽림정(竹林亭)이다.

이곳에는 이순신장군의 친필 '약무호남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라고적힌 복제된 편지가 걸려 있어 인상적이다. 마을 입구에는 왕인박사가 당시 일본으로 가는 출발지였던 상대포구(上臺浦口)가 남아있다. 삼국시대 이곳은 국제무역항으로 일본이나 중국으로 가는 배가 주로 출항했었다고 한다.

현재는 간척사업으로 인해 작은 규모의 연못으로 변했고 기념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이곳 구림마을은 마을 전체가 문화유산으로 가득하여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여유를 갖고 찬찬히 돌아볼만한 가치를 지닌 보기 드문 전통마을로 가히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영암군 군서면 서(西)구림(서호정마을)에 위치한 회사정(會社亭)은 구림 일대의 대동계 모임장소로 이용하기 위해 1646년에 세워진 정자이다.

영암군 군서면 서(西)구림(서호정마을)에 위치한 회사정(會社亭)은 구림 일대의 대동계 모임장소로 이용하기 위해 1646년에 세워진 정자이다.

영암군 군서면 서(西)구림(서호정마을)에 위치한 회사정(會社亭)은 구림 일대의 대동계 모임장소로 이용하기 위해 1646년에 세워진 정자이다.

영암군 군서면 서(西)구림(서호정마을)에 위치한 회사정(會社亭)은 구림 일대의 대동계 모임장소로 이용하기 위해 1646년에 세워진 정자이다.

영암군 군서면 서(西)구림(서호정마을)에 위치한 회사정(會社亭)은 구림 일대의 대동계 모임장소로 이용하기 위해 1646년에 세워진 정자이다.

영암군 군서면 서(西)구림(서호정마을)에 위치한 회사정(會社亭)은 구림 일대의 대동계 모임장소로 이용하기 위해 1646년에 세워진 정자이다.

영암군 군서면 서(西)구림(서호정마을)에 위치한 회사정(會社亭)은 구림 일대의 대동계 모임장소로 이용하기 위해 1646년에 세워진 정자이다.

영암군 군서면 서(西)구림(서호정마을)에 위치한 회사정(會社亭)은 구림 일대의 대동계 모임장소로 이용하기 위해 1646년에 세워진 정자이다.

영암군 군서면 서(西)구림(서호정마을)에 위치한 회사정(會社亭)은 구림 일대의 대동계 모임장소로 이용하기 위해 1646년에 세워진 정자이다.

영암군 군서면 서(西)구림(서호정마을)에 위치한 회사정(會社亭)은 구림 일대의 대동계 모임장소로 이용하기 위해 1646년에 세워진 정자이다.

편집에디터 edit@j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