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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라고 부르지 마라. 아직 해방을 맞지 못한 사람들일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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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라고 부르지 마라. 아직 해방을 맞지 못한 사람들일 따름"

이금주 전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회장
징용 끌려간 남편 그리며 피해자들의 대모 역할
정부 지원 없이 수십년간 치열한 싸움 이어와

게재 2019-03-03 19:31:27
공프 이금주(전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장) 할머니. 순천시 별량면 한 요양병원. 김양배 기자
공프 이금주(전 태평양전쟁희생자 광주유족회장) 할머니. 순천시 별량면 한 요양병원. 김양배 기자

"인터뷰가 힘드실 수도 있을 겁니다."

전화기 너머로 이국언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상임대표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이 대표는 3월 공프로젝트의 인물로 선정된 이금주 전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회장의 수제자 같은 존재였다. 오마이뉴스 기자였던 그가 소명처럼 이 길에 뛰어 든 것이 바로 이 전 회장 때문이었다. 때는 2008년 이었다.

당시 이 전 회장은 정부에 항의하기 위해 '국적포기 시위'를 계획하고 있던 중이었다.

"꼿꼿한 조선 여인, 그 자체였습니다. 당당하면서 품위가 넘치신 분이었죠. 일제 강점기 독립투사를 직접 눈으로 본 느낌이었습니다."

이 대표는 잠시 숨을 골랐다.

"그때 뵌 이 전 회장님은 피해자가 아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는 피해자였는지 모르지만, 해방 후의 이 전 회장님과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여전히 해방을 맞지 못한 그래서 일제와의 싸움을 멈출 수 없었던 또 다른 의미의 독립투사들이었습니다."

이 전 회장의 정의가 무엇인지 들은 적이 있냐는 질문에 이 대표는 "잘못을 저지른 자들이 사과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간단한 일이지만, 한세기가 다 지나는 지금까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일이죠. 바로 일본이 그렇습니다."

이 대표가 말하는 와중에 침상에 누워있던 이 전 회장이 말을 알아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필자를 빤히 쳐다본다. 아직도 눈빛이 힘이 실려 있었다. 인터뷰 중 처음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아래 인터뷰는 이 대표와 이 전 회장의 이야기를 조합해 재구성한 것이다. 이 전 회장은 단답형의 대답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부득이 이 대표가 중간에서 조절했다.

- 이 전 회장님은 치매가 찾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대변하는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였다고 들었다. 이 전 회장이 정말 바라던 것은 무엇이었나.

△사회적 관심을 바란 적이 있었죠. 한때는. 해방 후 국가가 피해자들 대신 돈을 받아서 도로를 깔고, 공장을 만들었지요. 정작 피해자들은 아무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이 전 회장의 남편은 일제에게 징용으로 끌려가 남태평양의 한 섬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국가가 준 것은 약간의 위로금이었습니다. 그러니 피해자들이 참을수 있었겠습니까. 조국은 해방됐지만 이들은 해방되지 못한 것이죠. 그런 시대에 이 전 회장님은 정부 지원 한 푼 없이 유족회와 피해자들 모임을 이끌고 일본 정부와 기업을 상대로 싸웠습니다. 매번 졌지요.

일본이 그랬습니다. "너희 나라에게 가서 물어봐라. 우리는 해줄게 없다."

수많은 조선인들을 강제로 끌고가 지옥같은 생활을 하게 한 일본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습니다. 국가도 외면했지요. 그 싸움을 지금까지 끌고 온 것입니다.

이제 그 싸움을 끝내는 것이 정말 이 전 회장님이 바라는 것이 아닐까요.

-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산다. 이 전 회장님은 치매지만 지금까지도 일본에 대한 싸움을 지속하고 있다. 이 전 회장님의 정의는 무엇인가.

△이 전 회장님이 살던 진월동의 작은 집은 유족회 사무실로 이용됐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명씩 사람들이 드나들었지요. 모두 똑 같은 아픔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전 회장님의 아들과 며느리도 나서서 도왔지요.

이 전 회장님이 말씀을 하실 때면 모두가 경청했습니다.

이 전 회장님은 항상 책상에 앉아 한쪽엔 사전을, 한쪽엔 각종 서류를 수북이 쌓아놓고 강제징용 피해자와 가족들의 기억을 손수 꾹꾹 눌러쓰며 정리했습니다. 만약 이 전 회장님이 그 싸움을 지속하지 않았다면 1273명의 징용 피해자들은 잊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진월동 집은 팔렸습니다. 더 이상 운영할 돈이 없어서죠. 이 전 회장님은 치매와 병마로 인해 이 작은 요양병원에 누워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소식지를 읽으며 재판이 어떻게 됐느냐고 묻습니다.

이 전 회장님의 정의는 무엇이었을까요? 제가(이국언 대표) 모시면서 들었던 말은 '우리를 동정하지 말라. 우리는 피해자가 아니다. 우리는 일본과 맞서 싸우는 사람이다'였습니다.

요양병원에 오기 전 까지 남편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여기 와서 이야기 하데요. 1942년, 갓 8개월된 갓난아이를 두고 남편이 강제 징용되던 날 "꼭 돌아 오겠다"고 말하며 떠난 남편의 구둣발 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고.

그 한걸음 한걸음마다 쏟아 낸 눈물이 여전히 기억난다고.

그래서 지금도 싸우고 있다고 이 전 회장님은 말했습니다. 싸움을 멈추면 그 기억마저도 사라져 버릴까봐서요. 이 전 회장님의 정의는 바로 '기억'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지 않는 것 말입니다.

- 2019년 현재 우리는 이 전 회장님께 무엇을 할수 있나. 어떤 것을 해야 그 삶의 깊은 무게를 덜어 드릴 수 있을까.

△동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당하게 그들을 바라봐줘야 합니다. 이제 피해자들도 몇 명 남지 않았습니다. 이 싸움을 이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일제 강점기, 가진 것 없고 운이 없는 몇 명이 끌려갔다 살아온 게 아닙니다. 한 나라가 침략을 당했고, 자국민을 지켜주지 못한 국가 때문에 이유도 모른 채 조선인들이 끌려갔습니다. 아내를 부르며, 부모님을 부르며 죽어갔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다 해결됐다고 합니다.

이 전 회장님과 유족회는 "아직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제와 싸움은 아직 끝난게 아니라구요. 그러니 이들의 외침을 단순히 피해자의 울부짖음으로 듣지 말아 주십시오. 이들의 외침은 아직 해방이 되지 않은, 그래서 일제와의 싸움을 멈출 수 없는 대한민국의 독립투사들의 외침임을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이 이들에 대한 2019년 우리들의 의무이자 예의가 아닐까 합니다.

영상취재: 채창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