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주 감독 ‘승부’. 바이포엠스튜디오 제공 |
![]() 김형주 감독 ‘승부’ 포스터. 바이포엠스튜디오 제공 |
1988년(영화와 달리, 실제로는 1989년 9월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했던 독보적 아나운서 차인태가 전하는 MBC 9시뉴스 “조훈현 9단이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회 응창기배 세계바둑대회에서 중국의 섭위평 9단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대회의 룰은 백이 8점을 선점하고 무승부인 경우에는 백이 이기는 것이었는데, 조훈현은 흑이라 꽤 불리한 조건이었다. 그러므로 흑으로서는 값진 승리가 아닐 수 없다. 한국 프로 바둑사상 최초의 세계 제패인만큼 환희에 찬 조훈현(배우 이병헌)은 “이제 바둑의 신과 대결해도 이길 것 같습니다”라는 김포공항에서의 인터뷰를 마친 후 종로2가 한국기원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이며 금의환향했다. 정부는 그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했다.
5개월 후, 이를 축하하는 행사 다면기(한 명의 고수가 여러 명의 하수를 상대하여 동시에 여러 대국을 두는 일)가 야외 대국장에서 열렸다. 이곳에서 두각을 보이는 한 소년 이창호(아역배우 김강훈)와의 조우는 마치 조훈현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하다. 그는 창호에게 숙제를 하나 내준다. 어느날 우편물을 통해 숙제를 푼 창호를 만나기 위해 훈현은 전주행을 하고 그날 대국 후에 창호를 내제자로 들인다. 상경 이튿날. 기원에 간 창호는 여러 사람을 이긴 후, 관심이 쏠리자 다면기를 두며 기원을 뒤집어 놓고는 귀가한다. 집에서 스승 훈현의 따끔한 수업이 이어짐은 물론이다. “포석(중반의 판을 위해 초반에 돌을 배치하는 방법, 대국자의 성향을 드러냄), 행마(활로와 영역을 넓혀나가는 방법), 수읽기(상대방이 둔 수의 의미를 해석하고 장차 일어날 변화를 예상, 추리하여 최선의 수를 선택하는 과정)보다 중요한 것은 ‘태도’다.
기본부터 배우라. 승패를 떠나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예의다. 반드시 오른손으로 두라, 이는 상대에 대한 존중이다.” 체력을 단련하라. 손이 먼저 나가는 경솔함, 대충 타협하려는 안일함, 조급한 승부를 보려는 오만함은 패배의 수순이다…. 스승 조훈현은 이기는 법을 강요하지 않으며, 이창호는 스승의 바둑을 탐구하며 묵묵히 자신의 스타일을 구축해 나간다. 내제자가 된 지 5년이 지나 15세 중학생이 된 창호(배우 유아인)는 바둑인으로 내공이 더욱 깊어져 있다. 심지어 스승 조훈현의 기보를 평가할 만큼 성장해 있다. 연구하고 노력하는 자를 그 누가 이길 것인가? 급기야 창호는 대결 대국을 이기고 올라와 마지막 결승에서 스승 훈현과 맞붙는 일이 계속된다. ‘청출어람’, 기특함을 기반으로 하는 이 단어가 주는 지옥을 이제 두 사람 모두 겪는 일에 접어든 것이다.
감독은 사운드나 화려한 영상기법, 편집 등을 배제한다. 묵묵히 시간의 흐름과 감정선을 따라가는 절제된 연출로 내공을 표현하고자 한다. 인물의 침묵, 눈빛, 복기하는 뒷모습 만으로 감정을 끌어낸다. 배우 이병헌은 조훈현의 자존심, 고독감, 회한 등을 밀도 높게 표현해낸다. 어느 경우는 배우의 얼굴이 조훈현의 얼굴로 착시될 만큼이다. 유아인은 이창호의 고요한 집중력과 내면의 파장을 묵직한 시선으로 구현한다. 배우 유아인이 마약 혐의로 재판을 받은 끝이라 (영화가 그 이전에 만들어졌음에도) 자숙하는 모습으로 비쳐질 만큼 숫기 없는 17세 소년의 묵묵함을 잘 전달하고 있었다.
영화는 승패를 나누지 않는다. (실제로, 총 311번의 대국에서 조훈현이 119승, 이창호가 192승을 거두었지만.) 조훈현의 내적 갈등과 고통 끝에 제자의 승리를 인정하고 자신을 돌아봄이야말로 영화의 핵심이다. 스승은 제자의 수를 받아들이고, 다시 공부하고 다시 바둑판 앞에 앉는다. 바둑을 통해 제자에게 가르침을 주었지만, 스스로도 배워야 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바둑기념관이 조훈현의 고향 영암에 설립되었다 한다. 영화도 보았으니 봄나들이를 이곳으로 가볼까 싶다. 백제예술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