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정연권>금목서·은목서 향기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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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정연권>금목서·은목서 향기에서 배우는 삶의 지혜
정연권 색향미야생화연구소장
  • 입력 : 2024. 10.16(수) 18:36
정연권 색향미야생화연구소장.
달콤한 향기가 바람결에 실려 와서 몸을 휘감는다. 마음이 가벼워지고 기분이 상쾌해진다. 금목서와 은목서 꽃이 피기 시작했나 보다. 들뜬 마음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봤다. 몇 송이 꽃에서 향기가 진동한다. 가녀린 줄기와 잎 사이를 보니 송알송알 꽃송이가 피어날 채비를 하고 있다. 만개할 날이 기다려졌다.

구례군에는 금목서와 은목서가 많다. 필자가 지난봄 구례읍 봉동, 봉남, 봉북, 백련리 일원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조사한 결과 10년 정도 성목이 200 여주가 있었다. 주로 금목서이고 금목서와 은목서를 짝으로 심은 가구도 많았다. 달콤하고 상큼한 향기에 행운과 번영을 상징하는 정원수로 사랑받아왔다.

목서(木犀)는 나무껍질이 무소의 피부와 뿔이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꽃 색깔이 금빛은 ‘금목서’ 은빛은 ‘은목서’라 한다. 무소는 코뿔소의 순우리말로 흔히 무쏘라 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은 “게으름 없이 열심히 묵묵히 부단히 홀로 정진하라”라는 뜻이다. 금목서는 만리향(萬里香)이라고도 한다. 향이 만리(萬里)까지 간다는 의미다. 샤넬 No5 원료로 사용돼 향수에 따뜻함과 복합성을 더해준다고 알려져 있다. 은목서는 천리향(千里香)이라고도 하며 금목서보다 다소 늦게 꽃이 핀다.

며칠을 기다리니 여기저기 꽃향기가 가득하다. 구례는 향기 천지가 됐다. 향기에 이끌려 나서는 발걸음이 가볍고 경쾌하다. 향기를 좋아하는 사랑꾼이 되고 향기를 찾는 탐색꾼이 됐다. 이 멋진 가을날 향기를 찾아다닐 건강한 몸이 있어 감사하다. 모두가 은혜요 축복이다.

구례읍 봉북리에 있는 가장 오래된 은목서를 찾았다. 물결치는 수관의 위용에 압도되었다. 짙은 안개 속에서 보니 신비로운 자태다. V자형으로 갈라진 줄기에서 폭 10, 높이는 8m 정도의 거목이다. 담장을 넘어 골목까지 가지가 뻗어있다. 잎사귀 사이 감춘 꽃에서 향기가 조금씩 표출되고 있다. 이 자리는 1940년부터 막걸리를 빚은 공신주조장이 있었다. 농부들의 고된 농사일을 잊게 해준 막걸리를 빚던 역사적인 자리다. 막걸리로 서민들과 농부들의 삶을 위무했는데 주인장은 떠나고 은목서만이 역사를 지키고 있다. 이웃에 사는 조선례(86) 할머니는 “19살에 시집왔는데 그때부터 있었다. 백 살 정도 되었을 거여.”라고 했다. 김일수(80) 어르신은 “1970년대부터 이 앞에서 양복점을 했는데 막걸리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가을에 꽃이 피면 향기가 너무 좋았다.”고 회고했다.

향기를 따라 골목길을 걸으며 생각해본다. 유난히도 뜨거운 햇볕과 여름을 견디고 잎과 뿌리의 부단한 노력으로 꽃을 피웠다. 하늘과 흙의 합작품이다. 금목서 향이 달콤하고 황홀하다면 은목서 향은 은은하고 상큼하다. 김춘수 시인 표현대로 금목서 향기가 농염하고 달콤한 포도주 같다면 은목서는 은은하고 상쾌한 잘 익은 막걸리 같다. 공신주조장에 은목서를 심은 것은 막걸리에 이 향을 담아 보려는 주인장의 마음이 아닐까. 가을빛을 머금은 은목서 향기로 빚은 막걸리는 ‘소박하고 정겨운 천향주(天香酒)’였을 터다. 꽃 색깔에 따라 향기가 다르니 신기하다. 서로 다르면서 비슷한 향기에 머리가 맑아지고 가슴이 시원해진다.

어느새 안개가 걷히고 파란 하늘이 눈부시다. 다시 백 살의 은목서 꽃그늘에 앉아 꽃잎에 아롱진 햇빛을 안는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이 하늘빛에 투영된 꽃잎 속에 파묻힌 은은하고 상큼한 향기를 꺼내어 내게 건넨다. 하늘이 내린 향기는 보이지 않지만 느끼는 향기를 보고 있다. 향기를 듣고 있다 “향기는 꽃의 거울이요 아름다움의 척도다”라는 말이 가슴에 다가온다. 맞다. 그리운 어머니의 냄새였고 헌신적인 사랑의 향기다. 하늘빛에 향기가 혼재한 풍경을 볼 수 있어 행복하다. 아름다운 가을에 향기가 있어 금상첨화다.

꽃향기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고도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는데 옹졸한 나는 그러하지 못했다. 여린 내 마음은 조그만 일에도 예민했다. 세상은 나의 작은 허점도 트집 잡고 흔들어 댔다. 나의 소심함을 공격하고 조롱했다. 그래서 늘 불안했고 초조했다. 모든 것이 일 욕심 때문이다. 구례를 꽃으로 가득 채워보려는 욕망 때문이었다. 이제 꿈을 접었다. 동분서주하며 부질없는 근심 걱정으로 보낸 세월이 무상하다. 일 때문에 상처받고 아파했던 모든 분께 깊은 사죄와 용서를 구한다. 자책과 상심의 마음을 달래주려는 듯 하늘에서 향기가 내려왔다. 신묘한 ‘천향(天香)’이다. 향기가 전하는 위로를 받는다. 향기가 마음을 어루만진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보이지 않으면서 느끼는 예술품이요 마음과 어우러진 향기는 고귀한 하늘의 선물이고 영혼의 결정체다. 엉클어진 서로의 마음을 풀게 하며 마음속 상처를 치유해준다. 보이지 않는 향기가 사람을 움직이고 사람을 변화시킨다. 반야심경의 “있음은 곧 없음이며 없음은 곧 있음이다”라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뜻을 이제 서야 깨닫게 됐다. 이제부터는 혼자서 묵묵히 정진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