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백 살림위원장 |
취업, 생존경쟁이 치열해지는 뿌리에 학벌주의가 있음을 놓친 반쪽짜리 진단도 문제였지만 학벌주의의 끝을 ‘학벌 있는 청년의 신분보장 실패’로만 본 것도 아둔했다. 단체의 유언장이나 쓰면 족할 걸 운동의 유언장을 쓰고 해산한 탓에 서울 단체의 해산은 학벌주의를 부정하는 증거로 악용되기도 했다.
여전히 인문계 학교 현관에는 학교를 빛냈다며 서울대 진학생 이름이 걸렸고, 입시 매니저로 전업했지만 손전화 뒷자리 번호가 아직 ‘2875’인 전교 1등 엄마는 왜 생기부를 그따위로 썼냐고 극성을 부렸는데도 그랬다. 중학교에서까지 ‘진로문화탐방’이라는 이름으로 명문대를 순례하며 대학 상징물 앞에서 사진을 찍고, 호랑이나 독수리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SKY 언니, 오빠들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학벌주의를 시각화, 촉각화, 미각화하는 여행이 한창이었는 데도 그랬다.
2016년은 모 은행에서 1차에서 떨어진 SKY출신 면접자를 심사기준과 평가 점수까지 조작해 가면서 구제하는 일이 일어난 해이기도 한데, 다른 건 몰라도 이 시대의 청소년들은 여전히 학벌주의로 뒤범벅된 그림자 교육과정 안에서 학벌주의를 맡고, 먹고, 만지고, 들이마시며 살고 있다.
최근 서울대학교 발전재단(이하 서울대)이 재학생 부모에게 ‘나는야 서울대 엄마, 아빠’라 쓰인 차량 스티커를 수 천장 넘게 보호자에게 배부한 바 있다. 이 일은 사회적으로 크게 논란이 되었는데, 우리 단체는 이를 학벌주의에 기대어 천박한 자랑을 부추기는 행태라 비판하였다. 또한, 대학 측의 이 같은 행태가 학벌주의를 더 곪게 만든다는 판단으로 국가인권위에 진정을 제기하였다.
SNS에 한 누리꾼이 해당 스티커 사진을 올리며 ‘학교 뱃지, 학과 잠바에 이은 계급 과시’라 평한 이후 시민들의 높은 관심 속에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학벌주의에 담겨 살거나 눌려 사는 대한민국에서 ‘문제는 알지만 어쩔 수 없는 것’처럼 푸념하기만 하던 학벌주의에 대해 꽤 의미 있는 성찰과 비판들이 생생하게 쏟아져 나왔다.
어떤 이들은 ‘미국에서도 흔한 굿즈이며,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자식 자랑하는 데 웬 열등감 폭발?’이라고 반응했지만, ’노동과 교육이 얽혀 있는 정도, 학벌주의에 찌든 정도 등 우리나라 상황을 외국과 단순하게 비교할 수도 없으며, 성인 자녀가 간 학교자랑을 왜 부모가 모는 자동차에 하느냐‘는 반응이 주류였다.
자식을 의대생, 서울대생으로 만든 일을 가족의 성과로 과시하는 것은 어쩌면 이 시대에 솔직한 자랑일 수도 있다. 그 표식을 취하는 데 든 가문의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에. 우리나라 1년 사교육비는 이제 30조원을 넘게 될 것이고, 자녀의 학벌이 집안의 경제력에 비례한다는 연구와 통계는 이미 차고 넘친다. 고소득 가정에서 부모 중 한쪽이 10년 넘도록 이어지는 입시 마라톤의 매니저가 되기 위해 일을 포기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학벌을 취득한 학생은 집안의 힘으로 그 자리에 도착한 것이다.
그리하여 서울대 스티커는 입시에 우월한 집안의 유전형질, 부모 세대의 경제력과 문화적 자양분 등이 자식의 몸을 통해 배합되어 시험이라는 절차를 거쳐 ’공정하게‘ 세습된, ’근대적인 양 봉건적인‘ 신분증이다.
신분을 ’피‘로 세습하는 시대 때는 불합리한 신분 세습에 대한 미안함이라도 생겼겠지만, 이미 능력주의와 버무려진 학벌주의의 신분증은 우리 사회에 폭군처럼 군림하며 피라미드 아래에서 위로 오르는 사다리를 걷어차거나 사회적 약자에게 배분되는 빈약한 자원을 ’무능력하다‘는 딱지를 붙여 정당화할 명분이 된다.
우리단체는 학벌주의를 조장하는 관행에 그간 꾸준히 문제제기 해왔고, 때로는 몸으로 때로는 언어로 힘차게 싸워왔다. 소위 명문대학을 중심으로 과잠을 만들고, 그 가족임을 알리는 스티커를 제작하는 행태는 학벌주의가 시각화된 결과다. 우리 역시 학벌주의에 맞서는 마음, 학벌주의로 뒤틀린 세상을 이겨내려는 사람들의 연대를 드러내고자 학벌없는사회 굿즈(뱃지, 과잠)를 제작하고자 한다.
이를 위한 펀딩에 즐겁게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는 바이다.
학벌주의가 너무 단단해서 그것이 깨진 세상을 상상하기 어렵다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인간이 깰 수 없었던 차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이번 사건을 두고 세상에 쏟아진 시민들의 언어로 학벌주의를 깨기 위한 여정은 시작되었다. 우리는 ‘학벌’의 울타리를 넘어 ‘평등’의 광장으로 나아갈 것이다.
학벌없는 세상을 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