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밭과 어우러진 병방마을 풍경. 마을 어디라도 감나무가 지천이다. |
마을 벽화. 옛 강변 백사장 풍경을 그리고 있다. |
한여름 햇살에 감이 몸집을 키워가고 있다. |
1597년 8월 3일 자 이순신의 〈난중일기〉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돼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첫날 구례에서의 이야기다. 때는 여름 무더위가 끝나고, 초가을 내음이 묻어나기 시작한 양력 9월 13일이었다.
이순신은 손응남이 갖고 온 올감을 한입 베어 물며 원기를 되찾았다. 올감은 이른 감, 갓 수확한 조생종 햇감이다. 이순신은 감을 먹으며 결기를 다잡았다. 일본군과의 기나긴 전쟁에서 승리하는 달콤한 상상도 했다.
구례에서 하룻밤 묵은 이순신은 이튿날 이른 아침 길을 나섰다. 섬진강변을 따라 구례구를 거쳐 압록 방향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지금의 섬진강변 대나무숲과 병방마을을 지나는 길이다.
오늘날 구례특산이 된 감이 섬진강변에 지천이다. 강변은 물론 구릉과 산자락, 마을 주변 논과 밭에도 온통 감나무다. 집 마당에도 감나무 한두 그루씩 다 자라고 있다. 한여름 햇살에 감나무는 기진맥진하지만, 감은 튼실하게 몸집을 키우고 있다. 마을이 더 정겹게 다가온다. 감나무 있는 집은 어디라도 고향집 같아서다.
감나무가 지천인 병방마을은 전라남도 구례군 구례읍 원방리에 속한다. 마을이 병방산 아래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 이름은 본디 ‘잔수(孱水)’ ‘찬수(燦水)’였다. 조선 태조 때 설치된 역참(驛站)이 문을 닫고 관반(館伴)이 철수하면서 병마산은 ‘병방산’으로, 찬수는 ‘병방(丙方)’으로 바뀌었다.
역참은 마굿간과 여관을 제공하며 공적 업무를 대행하던 곳을 가리킨다. 말을 관리하면서 사람과 말이 쉴 수 있는 숙박시설이었다. 관반은 사신 영접을 관장하는 영접도감(迎接都監)의 주무관을 일컫는다.
강 이름도 ‘잔수강’ ‘찬수강’으로 불렸다. 강물 흐르는 소리가 잔잔하다고 잔수강, 물결이 빛난다고 찬수강이었다.
섬진강은 길이 212.3㎞에 달한다. 전북 진안에서 발원해 광양만에서 바다와 몸을 섞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긴 강이다. 하구로 침입한 왜구를 수십만 마리 두꺼비가 울부짖어 물리쳤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강 이름에 두꺼비 섬(蟾) 자가 붙은 이유다. 두꺼비강이다. 구례읍 신월리와 문척면 죽마리를 잇는 두꺼비다리가 놓인 이유이기도 하다.
긴 강줄기를 지닌 섬진강은 구간마다 이름을 달리한다. 유역의 지형과 경관에 따라 적성강, 순자강, 섬강, 두치강, 잔수강, 악양강, 하동강 등으로 불렸다. 구례에선 ‘섬강(蟾江)’으로 불렸다. 잔수진(孱水津), 지금의 구례읍 신월리에서 광양만에 이르는 물줄기를 ‘섬강’이라 했다.
섬진강은 모래가 곱고 많다고 ‘모래가람’ ‘다사강’으로도 불렸다. 일제강점 땐 모래 때문에 주민들이 고초를 겪었다. 광업권을 쥔 일본인이 사금을 채취하기 시작했다. 강변을 마구 들쑤신 탓에 모래가 유실됐다. 이리저리 샛강이 생기고 강도 황폐해졌다.
사금 채취는 1930년대 중반 큰 홍수가 날 때까지 계속됐다. 강변 백사장이 온전할 수 없었다. 강 이름이 섬진강으로 불린 것도 그즈음이다.
“어마어마했어.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백사장이었어. 백사장이 우리들 놀이터였는디. 날마다 친구들이랑 물놀이하고, 은어도 잡고, 다슬기도 잡으면서 놀았지. 바닷가 백사장만큼이나 넓었다고, 여기가. 우리 어렸을 때는 그랬는디, 지금은….”
강변길에서 만난 이웃 마을 주민의 말이다.
강변에 대나무를 심은 것도 그때다. 사금 채취로 백사장이 유실되면서 물난리가 잇따랐다. 강둑이 터지고, 마을도 위험해졌다. 마을에서 농사를 짓던 김수곤 씨는 장마철이 되면 밤잠을 잘 수 없었다. 강변에 대나무를 심은 이유다. 빨리 자라는 대나무가 숲을 이루면 재해를 막고, 강변 풍경과도 잘 어우러질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강변 대숲이 지금은 구례의 새로운 관광자원이 됐다. 강변을 따라 길게 늘어선 대숲에서 율동미가 느껴진다. 살랑이는 강바람에 가붓하게 흔들리는 그네도 낭만을 더해준다. 어둠이 내려앉은 대숲에선 경관용 불빛이 반짝인다. 흡사 무리를 지어 날아다니는 반딧불이 같다.
4년 전 여름 물난리의 흔적은 겉보기에 없다. 당시 폭우는 섬진강을 집어삼키고 강둑마저 무너뜨렸다. 거칠게 밀려드는 강물에 주민들은 속수무책이었다. 악몽은 지금도 주민들 마음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날의 참상을 잊은 듯, 마을 앞 강변은 피서지로 각광받고 있다. 강변 정자는 ‘무하정(無夏亭)’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다. 강변에서 평상도 빌려준다. 지난해까지 마을부녀회에서 당번을 정해 운영했다. 다들 몸이 불편한 탓에 지금은 포기했다. 개인이 관리하고 있다.
마을 앞 강변에 리훈(里訓)을 새긴 표지석도 눈길을 끈다. 큰 돌에 ‘애경무한(愛敬無限)’이라고 새겨져 있다. 한없이 사랑하고 존경하며 함께 살고자 하는 마을사람들의 마음이다. 넉넉한 강변 풍경처럼, 보는 이의 마음까지도 느긋하게 해준다.
자동차를 타고 도로만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결코 알 수 없는 섬진강변 병방마을이다.
이돈삼 <여행전문 시민기자·전라남도 대변인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