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 계엄군에 맞선 ‘오월의 마을’ 기억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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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5월, 계엄군에 맞선 ‘오월의 마을’ 기억해주세요”
●5·18민주화운동 44주년
태봉마을의 비극 <1>들어가며
'최초' 소태·지원동 지역방위군 결성
총 84명 주요길목 경계·총격전 벌여
항쟁 후 연행돼 고문 등 지속 탄압
“주민 모두 피해자·투사… 관심을”
  • 입력 : 2024. 05.06(월) 18:29
  • 정성현 기자 sunghyun.jung@jnilbo.com
태봉마을 주민들이 떠나간 빈집이 흉가처럼 방치돼 있다. 송민섭 기자
광주 동구 소태동에 자리한 태봉마을은 1980년 5월과 관련된 뼈아픈 역사를 안고 있다. 이곳 주민들은 5·18 당시 계엄군의 무지막지한 강경 진압에 분개해 지역방위군을 편성·투쟁했다. 경찰은 이를 빌미로 항쟁 직후 마을에 상주하며 주민들을 지속적으로 탄압했고, 일부는 계엄당국에 연행돼 온갖 고문을 받기도 했다. 군·경의 횡포에 짓밟힌 주민들은 오랜 기간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이들은 결국 마을을 떠났고 현재는 당시를 기억하는 주민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태봉마을의 항쟁과 수난은 지난 1980년 이후 44년 동안 정확한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구술로만 전해져올 뿐 체계적 보존과 관리·보상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5·18때 계엄군의 버스에 대한 총격으로 17명이 사망한 지원동 주남마을이 사회적 공론화를 거쳐 진상규명 조사, 다양한 사업 등이 진행된 것과는 대비된다. 이에 본보는 잊혀진 태봉마을의 오월 역사를 조명·기록하고, 마을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알리기 위한 후속 과제를 시리즈로 게재한다. <편집자 주>



‘왕실의 태가 묻힌 곳’인 태봉(胎封)은 조용하고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약 100가구의 주민들은 무등산 자락을 등에 업고 큰 규모의 부락을 이뤘다. 그러나 1980년 5월 공수부대가 광주에 들이닥치면서 평온하던 마을에 비극이 찾아왔다. 같은 달 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자행된 계엄군의 집단 발포로 많은 이들이 희생되자 광주시민들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무장을 시작했다. 차량에 탑승한 시민들은 나주·화순 등 인근 지역으로 빠져나가 광주 상황을 전파하고 파출소 등지에서 무기를 획득했다.

광주에서 시민군이 조직되자 계엄군은 화순 능주와 동구 주남마을로 후퇴했다. 시민들은 퇴각한 계엄군이 다시 시내로 진입할 것을 대비, 외곽지역을 중심으로 지역방위군을 결성했다. 가장 먼저 시민군이 꾸려진 곳은 태봉마을 ‘배고픈 다리(홍림교)’였다. 화순 방향에서 돌아온 마을 주민·시민들이 인근에 있던 예비군 중대와 규합해 ‘소태·지원동 시민군’을 결성한 것. 예비군 체제를 활용했던 이들은 각 조당 7명씩 12조(총 84명)를 편성해 증심사 방향의 광주 길목을 차단했다. 당시 광주의 ‘시민지역방위군’은 지원동을 비롯해 △백운동 △화정동 △서방삼거리 △산수동 등지에 결성됐다.

마을 주민과 예비군은 구급차와 각목으로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전남도청 시민군 지휘부에서 하달받은 암구호를 쓰는 등 체계적이고 쉴 틈 없는 경계를 펼쳤다. 당시 광주 중심가에서 퇴각한 7·11공수여단이 조선대학교 뒷산을 타고 태봉산으로 넘어와 진지를 구축한 탓에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이들은 22일 자정 조선대 뒤 깃대봉에서 배고픈다리 쪽으로 내려오던 계엄군과 30여 분간 총격전을 벌여 퇴각시키기도 했다. 이튿날 오전에는 총격전 이후 낙오된 계엄군을 생포, 전남도청으로 이송했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태봉마을 주민들은 김밥과 주먹밥·박카스·담배 등을 마련해 함께했다. 지역방위군은 5월 23일 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총기회수 결정에 따라 평화적으로 해체됐다.
1980년 5월과 관련된 슬픈 역사를 안고 있는 광주 동구 소태동에 위치한 태봉마을. 이곳 주민들은 5·18 당시 계엄군의 강경 진압에 맞서 지역방위군을 편성해 맞서 싸웠다. 사진은 마을전경과 입구에 세워진 표지판. 김양배 기자
항쟁이 끝난 후 태봉마을은 평화를 찾는 듯했지만, 소태·지원동 지역방위군에 상당수 참가했던 주민들은 계엄당국의 주요 표적이 됐다. 도청 진압 당일인 27일부터 수사관들이 몰려와 40여 명의 마을 주민들에게 ‘숨겨진 총을 내놓고 가담자를 말하라’고 추궁했다. 이 과정에서 고문을 버티지 못한 몇몇 사람들은 옆집 청년, 같이 살던 가족의 이름을 대는 등 ‘거짓 증언’을 했다. 이름이 한 번이라도 나온 이들은 모조리 끌려가 또 고문을 당했다. 그렇게 태봉마을은 심각한 내분·갈등으로 갈라섰다.

그해 11월까지 이어진 고난은 마을 주민들에게 큰 트라우마가 됐다. ‘감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은연중 두려움에 떨기도 했다. 마을을 지키고자 목숨까지 내걸었던 주민들은 결국 하나 둘 떠났다. 곳곳에 빈집이 늘어났고 오월 항쟁의 뜨거운 현장이었던 이곳은 옛 모습을 찾지 못할 정도로 변해갔다. 이제 이들을 기억할 수 있는 건 지난 2016년 동구 마을공동체 활성화 사업을 통해 마을 입구에 세워진 태봉마을 이정표와 구술집이 전부다.

주민들은 올바른 오월 역사 재조명을 위해 광주항쟁 피해자들에 대한 치유와 공동체 회복·마을 재정비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같은 시기 오월 피해를 겪었던 주남마을은 검찰 조사를 비롯, 11공수여단 계엄군의 증언을 통해 어느 정도 진실이 드러났다.

50여년 동안 마을에서 살았던 장명희(79)씨는 당시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한다.

“마을 주민 모두 피해자이자 투사였지라. 시민군들에 밥 해주면 다음 날에는 남는 밥을 조선대 뒷산 군인들에게 전해주고 그랬어. 아주 무서웠제. 거기다 고문당했던 것 생각하면 아직도 머리가 흔들려부러. 고춧가루 물 먹여불고 거꾸로 매달아 두드려 패고 그랬제. 그런데 이걸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관심을 많이 가져줬으면 좋겄어. 후대가 최소한 우리 마을이 어떤 곳이었는지는 기억해야 하지 않겄나. 우린 아직도 공포 속에 살어.”
1980년 5월과 관련된 슬픈 역사를 안고 있는 광주 동구 소태동에 위치한 태봉마을. 이곳 주민들은 5·18 당시 계엄군의 강경 진압에 맞서 지역방위군을 편성해 맞서 싸웠다. 사진은 마을전경과 입구에 세워진 표지판. 김양배 기자
정성현 기자 sunghyun.jung@jnilbo.com